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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Mar 24. 2022

자신에 이르는 길

책을 읽다

책 ‘데미안’을 읽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책을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읽었다. 그렇게도  읽히던 책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던 책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기 , 당장 내일 해야  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휴식이 주어진 지금에서야 읽힌다. 아마도 그건 <바깥 세계>에서 한참을 벗어나 <내면 세계> 집중할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일까? 아님 내가  안의 <>  만큼 성장해서일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며 C.S. 루이스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C.S. 루이스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C.S. 루이스의 오랜 팬인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그는 C.S. 루이스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종종 C.S. 루이스에 대해 듣곤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C.S. 루이스는 우리 머릿속의 생각을 너무나도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나보다도 나의 생각을 더 잘 아는’ 자였다. 마치 그 모든 생각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자인 것 마냥.


​데미안을 읽으면서 그게 무슨 느낌이지 알 것 같았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표현한 한 자 한 자는 마치 헤르만 헤세가 나의 어린 시절을 엿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던 그 당시 나의 행동과 고민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범위의 그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도 정리되지 못하던 생각의 폭풍들을 너무나도 깔끔하게 표현해냈다.


​나에겐 그가 나를 이해한 신비스러운 작가였을지 모르나 어쩌면 그는 여느 예술가가 그렇듯 그저 인간을 통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한 명의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을 읽으며 과연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자아의 본질에 이르고자 <자신에 이르는 길>을 선택한 자의 삶을 그려내고자 했다. 인간이 되고자 선택한 자의 삶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바깥 세계>의 규범에 따라 살기를 무의식 중에 선택하며,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회피하고, 의미 없는 공동체 또는 <패거리> 사이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에 이르는 길>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그 어려운 길은 선택한 자이고 어쩌면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자일 수도 있다. 모두가 그 길을 보는 특권을 얻지 못한다. 설사 그 길을 본다 한들 대부분이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이 특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 그 특권을 가지지 않은 자이기에. 어쩌면 그 특권을 가진 자들에겐 그건 특권이 아닌 벗어나고자 하는 고통 또는 견뎌야 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그와 같은 인간에게만, 인간의 본질에 다다른 예술가들에게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며칠 전 양치를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부모님을 한 집에서 가까이서 지켜보며 쌓아 올린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부모님 또한 한 인간으로서 불완전해 보였다. 단순히 불완전한 성격 또는 성품에 대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데미안을 읽고 보니 그것은 자아에 대한 궁금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과연 완전한 스스로에 다다랐을까라는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스스로에 도달한 인간이 존재할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죽기 전까지 나는 나의 완전한 스스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찰이었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는 <완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p.8)


​아까 내가 특권이라고 표현한 <자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그 특권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지 않나 싶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p.8)


​헤르만 헤세의 말이 맞다. 모두가 인간으로 임종을 맞이하지는 않으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는 자연의 기원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우린 모두 <자신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는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7)

세상의 규범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 사회가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차가운 시선과 비난일 수도 있다. 홀로 선 듯한 외로움은 누구든 견디기 힘들다.

부모님의 울타리일 수도 있다. 안전한 보금자리는 떠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종교의 습관화일 수도 있다.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묻지 않게 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그건 나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심지어는 나의 무의식 속에서조차도 벗어나, 나를 바로 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헤르만 헤세는 <하나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하나의 세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세계에서 멀어져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식하고, 각성하고, 날아갈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p.8)


​헤르만 헤세가 이 글을 쓴 1916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시기에만 위문장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때만큼이나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혼미해진 상태이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젊은 세대의 똑똑한 외침은 사실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것이 나의 색깔이라고 주장하는 말들에는 사실 자기 자신을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허영심 만이 가득하다. 나를 드러내고자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과 매일 밤 향하는 사교모임들도 <바깥 세계>와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 <내면 세계>의 문턱에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기는커녕 더욱 불안정해지며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조차 없다.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진 자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투쟁하는 자가, 에바 부인, 데미안, 싱클레어, 그리고 그들 공동체와 함께 자기 자신을 살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필요하다.


​<완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에 이르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그런 자들 말이다.




Book Info: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 / 전영애 역

(민음사, 200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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