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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Sep 05. 2023

치정에 관한 두 가지 명상이 욕망의 내러티브로 변할 때

오래된 서랍REVIEW

               소설「사진관살인사건」/ 「거울에 대한 명상」과 영화 「주홍글씨」에 대한 소고



「주홍글씨」는 2005년 세상을 등진 영화배우 이은주의 유작으로, 2004년 10월 개봉했다. 이은주는 시사회장에서 ‘가슴속에 깊게 낙인찍히는 그런 영화’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어떤 연유이든 이 영화는 이은주의 가슴과 영혼에 낙인을 깊게 새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이은주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가 화제가 되었던 것은 진한 러브 씬과 강렬한 트렁크 씬 때문이다. 한석규는 지옥에 다녀왔다는 말로 그 어려움을 고백했고 이은주 역시 단연 힘들었던 촬영은 트렁크 씬이라고 동의했다.


직접 연기를 하는 이나 지켜보았던 이들, 그리고 감독조차 그 장면을 촬영하는 데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트렁크 씬이 관객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겠는가. 지독하고 집요함. 그 문제의 트렁크 씬은 영화에서 지독할 만큼의 효과를 얻었을까? 감독이 전달하려고 하는 주제 전달력을 위해 트렁크 씬을 원작에서보다 더욱 집요하게 확장해 주제와 연관되는 영화의 핵으로 삼은 의도를 충분히 살려낸 것인지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소설과 영화의 줄거리


영화는 각각 다른 소설집에 실린 김영하의 단편소설「사진관 살인사건」,「거울에 대한 명상」두 편을 엮고 거기다가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주홍글씨」의 제목과 주제 의식을 빌려 한 작품으로 녹여냈다. 스릴러와 치정의 기록. 변혁 감독은 이 소설들이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 안의 욕망을 건져내어, 한 남자가 겪는 두 가지 사건으로 각색했다.「사진관 살인사건」은 「주홍글씨」의 기훈이 수사하는 사건에 토대를 제공하는 소설로 작용한다.


일요일 오후 사진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최초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살해된 사진관 주인의 아내인 경희. 강력반 형사인 ‘나’는 남편보다 한참 어리고 육감적인 경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남자가 있었던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는 권총으로 위협당한 애인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간 뒤에 예수에게만 미쳐 지내고 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김영하의 소설답게 간결하고 건조하고 구태여 모든 걸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주홍글씨」와는 가장 다른 점이다. 감독은 원래 김영하의 소설 세 편을 하나의 이야기로 모으려 했다가 무리란 판단을 하고 두 편만 사용한 것이라 말한다. 영화 속 기훈에게 부여된 직업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아도 감독의 일차적 밑그림은 「사진관 살인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사진관 살인사건」과 함께 이중의 구조를 짜가는 소설은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이기적이고 자아도취 증세가 있는 남자는 대학 시절부터 섹스를 해왔던 여자 가희를 만나 산책을 하다가 장난 삼아 들어간 강가의 폐차 트렁크에 갇히고 만다. 장난스러운 여자의 행동으로 트렁크에 갇힌 남자는 체념과 분노를 오가다가 사디스트적인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에 질세라 맞대응하는 여자.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의 야비성을 감출 수 없는 남자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듯 여자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좌절한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던 아내는 그녀와 연인 관계였다. 남자는 자신이 보던 거울과도 같은 존재가 모두 깨져버렸음을 깨닫고, 세상에서 자신을 비춰주는 진정한 거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 이른다. 여기서 지리멸렬한 관계와 위장을 벗으면서 드러나는 진실은 파멸의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영화 「주홍글씨」에서 한 남자의 욕망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강력계 형사 기훈(한석규)은 단아한 아내 수현(엄지원), 매혹적인 정부 가희(이은주)와 함께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어느 날 살인사건이 주어진다. 사진관을 운영하던 남자가 살해되고, 기훈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망인 경희(성현아)의 치정살인을 의심한다. 한편, 기훈은 아내의 임신 뒤 불륜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점점 더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들 뿐이다. 기훈이 늪 같은 사랑으로 허우적대는 사이 살인사건도 점점 미궁에 빠져든다.


 기훈은 보험금을 노린 사진관 여주인 경희가 그녀의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였다고 짐작하지만, 증거를 잡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묘한 성적 매력까지 풍기며 기훈의 판단을 흐린다. 쉽게 풀릴 듯했던 사건이 점점 미궁에 빠질 무렵, 기훈의 사생활이 등장한다. 외양만으로는 임신한 아내 수현(엄지원)과 행복한 신혼살림을 살고 있는 기훈, 그러나 그녀는 그 몰래 낙태하고, 가희를 사랑해서 가희를 잡아두기 위한 수단으로 기훈과 결혼한 비밀이 있는 여자다. 가희와 수현은 대학 동창이다.


아내와 연인 사이를 오가는 기훈의 사생활과 치정이 일으킨 듯한 사진관의 살인 사건, 그 두 축이 기훈을 중심으로 서로 얽혀간다. 영화의 후반부, 가희 역시 기훈의 아이를 임신하고 기훈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나 그런 가희가 기훈은 부담스럽다. 수현과의 관계를 위해 가희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나, 가희의 생일날 인적 드문 교외에 차를 세워놓고 로맨스를 즐기던 기훈과 가희는 얼떨결에 트렁크에 갇히게 된다. 결국 그 속에서 그들 간의 진실은 모두 드러나게 되고 그런 어정쩡한 관계(각 세 사람이 각기 두 사람과 쌍을 짓고 있는)는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결과적으로 사진관 살인 사건의 범인은 엉뚱한 사람을 잡아넣게 되고 기훈은 모든 것을 잃은 후 사진관을 다시 찾아간다.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


두 편의 원작소설이 한 편의 영화로 묶이면서 주제와 캐릭터, 이야기 구성 방식 등에 있어서 변화를 보인다. 먼저 캐릭터들의 변화를 살펴보자. 영화에서 기훈은 강가에 세워진 승용차가 보이는 첫 장면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성격적 특성을 드러낸다.


“모든 유혹은 재밌다.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항상 장난같이 시작한다. 왜 피하겠는가?”


기훈의 내레이션 뒤에 탕, 탕 두 발의 총소리가 들리며 구멍이 보인다. 그리고 곧장 교차 편집이 이어진다. 승용차를 타고 달리며 오페라를 듣는 기훈의 신열에 들뜬 듯한 행동과 사진관의 지경희가 피가 묻은 몸으로 거리를 멍하니 걷고 있는 장면이 짧은 컷(?)으로 교차 편집된다. 이어 오페라를 따라 부르다가 조형사로부터 전화를 받는 기훈의 태도에서 세상의 추악함에 대해 즐길 줄 아는 악마적 유희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유혹을 피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자양분으로 빨아들이며 욕망의 거리를 헤집고 다닌다.


그러나 이러한 교차 편집은 주제 혹은 기훈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물론 영화의 종반부에 가면 자기 욕망의 실현 앞에서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기훈은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 그의 분열이 그것이다. 악마적 유희성은 보이지 않는 힘 앞에서 선악의 개념으로 분화, 분열한다. 선과 악의 양 극단을 오가면서 분열하던 기훈은 자신을 놓쳐버리고 공포감에 휩싸여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한다. 어떻게 보면 한 죄인이 거듭나기 위한 희생 제의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영화는 현대성을 놓쳐버리고 인과성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소설 속의 남자는 악마적이지 않다. 「사진관..」에서 무정자증이란 결함이 있는 남자는 현재 평범하고 균형 있는 성격의 형사다. 그러나 「거울에 대한..」의 남자는 이기적, 냉소적인 나르시시스트로 자기 거울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그러면서 쾌락을 원하나 그 쾌락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귀찮아하는, 실은 눈이 어두운 자이다. 그 역시 한계상황 속에서 잠시 분열하는 듯하나 이내 수습하고 진실에 눈을 떠간다.


 영화 속 기훈의 캐릭터는 「거울에..」에 등장하는 남자에 좀 더 극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있다.


기훈을 축으로 세 여자가 있다. 이들은 소설에서 영화로 오면서 좀 더 캐릭터 자체가 끈적해지는 경향이 있다. 가희와 수현, 경희. 두 개의 이야기를 붙이다 보니 「거울..」의 성현은 기훈의 처이면서 가희와 함께 음악을 공부한 동기이자 친구, 변심한 연인으로 등장하고 경희는 원작과 달리 최종적인 남편의 살인자로 설정이 된다. 이들이 끈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 욕망에 대해 열려 있는 기훈을 중심으로 얽히고설켜 들어가야 하는 탓이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은 기훈 앞에서는 맥없어지고 자기 자신을 잃고 무력해지는 듯하다. 특히 가희는 기훈과 결혼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국 죽음 택함으로 가희는 소설과는 달리 무너져 내린다.(소설에서 보면 가희는 점점 자신과 기훈에 대해 명확히 인식해 간다.)


기훈이 그녀의 중심이었다면 왜 그녀는 기훈과 수현과의 결혼을 만류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설정들이 만들어진다. 형사의 무정자증이 총이 상징하는 바와 동일시되는 듯 기훈의 공격적이고 왕성한 성욕은 수현과 가희에게 수차례 임신과 중절을 시키는 능력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자신이 설정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캐릭터들의 성격과 직업, 에피소드들을 조금씩 가감하고 있다.        


이중적 이야기 구성방식과 주제


두 개의 이야기 구조가 있다. 그중 '사진관 살인 사건'은 이기훈이 담당한  사건이 사적인 이야기하고 겹치면서 거울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사진관에서의 사건은 후반부의 사건과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탐욕, 죄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변감독은 자신이 원래 이중구조에 천착하기도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주제를 드러내는 데에는 그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주제의식을 전달하려는 강박이 심해서일까. 「주홍글씨」는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한다. ‘선의에 의한 행동일지라도 (원) 죄는 용서가 안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주장이다. 무리다 싶은 반전도 마다하지 않는 건 이 같은 예정된 결론에 당도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종교적인 주제를 간파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홍글씨」는 적절한 메타포를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창세기 3장 6절, 살인 도구로 사용되는 성모상, 성당에서의 고해(고해를 받는 신부는 이 한 장면을 위해 아무 이유 없이 연주회 신에서 얼굴을 비친다) 장면 등이 내포한 종교적 상징성은 영화적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다.


감독의 말마따나 이 영화를 종교 영화로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성서적 진실을 겸허히 수용하라’는 그 완강한 어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주홍글씨」는 '각성을 촉구하는' 영화인 것이다. 죄의식의 심연에 대해 정의한 창세기의 예화를 '원초적인 사건'으로 상정한 「주홍글씨」의 도덕적인 시선에는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그 결정론적 세계관, 진실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있다. 영화 한 편을 통해 인류사를 관통해 온 종교적 진리를 설파하려는 거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는「주홍글씨」는 전지적인 위치에서 관객을 조종하려 든다. 여기서부터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섹시한 정부, 신비로운 미망인 등 남성 판타지의 전형인 고루한 여성 인물들을 배치한 것이나 모든 인물들에게 죄행에 따른 철퇴를 내리기 위해 반전을 사용한 것, 투박한 종교적 상징을 남발한 것은 모두 이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더 치명적인 건 예외를 허용치 않는 이 같은 태도가 변혁 감독이 즐겨 쓰는 형식적 구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이는 형식과 주제의 불화를 야기한다. 이중의 액자 구조와 캐릭터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구조는 ‘한 가지 현상에 대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일방의 시선으로는 부족하며 다중적인 시점에서의 관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도입된 것이다. 하여 경희와 명식, 동네 양아치의 진술이 엇갈리고 기훈의 믿음이 흔들릴 때까지만 해도 이건 진실의 상대성을 입증하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가 흔들리면서 영화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한 가지 입장만으론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중 구조를 택한 영화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적 진실'을 상정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우의 수들을 차단하고 모든 인물들을 패잔병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주홍글씨」의 이중구조는 작가적 자의식에 의한 형식적 제스처로 전락하고 만다.     


트렁크의 사용


트렁크에 갇힌 상황이 어떤 느낌을 주었기에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선택하게 된 것인가에 대해 감독이 직접 말한 의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설에서는 그 설정이 크게 발전되지 않는다. 옛날이야기를 회상하는 정도다. 사실 트렁크라는 공간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둘만의 공간이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가면 못 견디게 힘든 공간이 되고, 차라리 이 꼴을 보이느니 안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처음 가졌던 욕망의 시작, 환상 같은 것들이 계속 이어질 경우, 그 끝이 굉장히 끔찍한 것이라는 점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인공 이기훈이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 아닌가. 굉장히 예뻐 보이는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한 공간이다.”


감독의 말대로라면 영화에서 트렁크라는 공간은 과잉 설정된 듯싶다. 그 트렁크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분출은 등장인물 특히, 기훈의 부도덕성을 해체하기 위한, 강압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과도한 트렁크 신은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구겨 넣어야 그들이, 그가 반성을 할 것이기 때문에 넣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화해하고 서로 욕망을 나누고 할 것이니.

 

소설에서 사용된 트렁크란 공간이 단순히 옛날 일을 회상하는 공간으로만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이는 변 감독이 원작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낸 것은 아닌가 한다. 원작에서 트렁크란 공간은 단순히 회상을 위해 장치된 것이 아니다.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트렁크란 공간이다. 작가는 여기에 구멍에 대한 이야기와 욕망의 채우고 비움에 대해 말하며 현대인의 의식에 대한 문학적 장치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 왜 굳이 자의적으로 나갈 수 없는 트렁크였겠는가? 감독 자신이 각색 과정에서 트렁크란 공간을 상당히 철학적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과도한 자기 칭찬에 기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영화나 소설에서 트렁크가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역할은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영화가 낙태 뒤 피를 뒤집어쓴 가희의 모습을 좀 더 자극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붉은 피가 희생제의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트렁크 사용의 깊이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지. 피가 있으나 없으나 트렁크는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영화에 대한 몇 가지 딴지: 현대인의 분열된 욕망의 자화상에서  21세기 기독교 근본주의로?


남성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설파하는 영화라는 비판: 영화 칼럼니스트 황선미는 「주홍글씨」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갈팡질팡하는 가치판단을 반영하고 있기에 ‘리얼’하다는 신윤동욱의 입장(「씨네 21」 478호)에 반대한다며 비판한다.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애매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감독의 확고한 가치판단’이며, 그 가치관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보다 더 남성중심적이고, 심지어 19세기 소설「주홍글씨」 보다 더 수구적이다. 영화는 ‘죄’와 ‘벌’의 구도를 빌어,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정치학을 설파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세기 소설「주홍글씨」는 사제와 간통녀의 역전된 윤리를 통해 청교도 남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한 작품이었다. 반면 간통의 아이콘으로 ‘주홍글씨’의 제목을 빌어온 이 영화는 ‘간통은 죄다, 특히 여자에게’라는 수구적인 교훈과 ‘남성중심주의’ 및 ‘이성애 중심주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쓰기’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통념은 이미 변하고 있지만, 이를 반영치 못하는 국가법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율법을 이 영화가 암송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병원은 「주홍글씨」에선 자기모순이 발견된다고 보았다. ‘죄와 처벌’의 불요불급한 관계라는 절대적 진실을 설파하기 위해 영화는 스스로 중히 여기는 '진실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만다. 그리하여 무척 고민했음직한 상징들, 즉 둔기로 사용되는 성모상,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권총에 대한 메타포 등은 효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자 역시 오히려 그걸 사용하지 않은 소설보다 참신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은 장르적 영화 관습에 충실하지도 반역하지도 못했다는 평과 그로 인한 새로움이라고는 포즈만 있을 뿐 예술적 실체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는 등등. 이러한 지적들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오며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캐릭터나 배경 설정 등에서 훨씬 화려해졌고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듯하지만 현대인의 분열된 욕망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엔 사유의 공간이 없다. 감독의 말처럼 ‘죄로 인한 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도 균형을 잃은 전근대적인 세계관 속에서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 속에서 헤매고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비판당하고 극복대상이며 문젯거리인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기존 서구기독교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근본주의적 남성적 판타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원작 소설이 그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역시 소설에서도 그런 징후는 여러 군데서 보인다. 다만 영화만큼 자기 고집에 매몰되는 고루함이 덜 하다는 것이다. 현대적 삶의 틈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음이 그래도 소설에서는 엿보인다.  


영화의 좋은 점이라면 전문가들의 평을 떠나서, 화려하고도 풍성한 볼거리(리얼리티를 떠나서)와 이중구조로 지루하지 않게 사건을 끌고 가는 재미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스릴러란 장르로서는 너무 서툴거나 과잉되어 있었다 한다 해도 치정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간다는 자체가 재미있긴 했다. 좀 더 가지치기 하고 감독의 과잉 개입이 절제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밀고 들어가는 지독함 역시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사랑한 죄를 혼자 다 뒤집어쓰고 가는 가희를 보면 비정하고도 잔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각색의 단점으로 꼽고 싶은 것은 근본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비판받은 작가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너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분열되는 욕망을 보여 주려 했다면 열린 구조로 갔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영화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보였어야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한 장치는 발견하지 못했다. ‘죄와 벌’은 구원이 전제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영화를 통해 현대인들의 도덕적 해이성을 질책하려 했다면 실패란 말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욕망의 부도덕성과 갈팡질팡의 결과로 보여주는 이미지의 잔인성은 충격적이다. (트렁크 속에서 욕망의 결과로 잉태된 태아와 피투성이로 죽어야 한 가희). 그것이 죄가 될 수 있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도덕적 세계가 포스트모던하다는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희생자들은 늘 같은 구조 속에서 고통받고, 고통은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세계가 아닌가.


감독이 사회적 제도적 구조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죄/벌을 파악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인간의 욕망의 고리는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금융자본주의가 촘촘히 짜가는 전지구적 죄의 그물망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투영되는가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 영화의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이른 나이에 구구한 소문을 뒤로하고 먼 여행을 떠난 영화배우 고 이은주를 추모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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