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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Feb 18. 2024

중세의 가을

오래된 서랍POETIC

중세의 가을



날이 풀리면 

풀은 천연덕스럽게 새싹을 틔우고         

자기 영역을 구축한다 

사람들이 잡초라 부르는

관목과 잔디를 뒤덮은 풀들의 얼굴을 

노인은 알고 있다 

개망초와 토끼풀, 쑥부쟁이 

살살거리는 강아지풀까지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예초기를 돌리며

아파트 곳곳을 지나고 

공원을 돌아 나오면 세상은 한층 납작해진다

들끓던 여름이          

       낙엽 떨어지듯 나가떨어질 때까지 

무수한 풀들을 댕강댕강 자르며 

천둥오리와 함께 물속을 첨벙거린다

동력 장치가 폭발하고 

톱날이 부러질 때마다

달려드는 하루살이 쫓아내며 노인은 생각한다

지금 이곳의 여름은 다른 우주의 가을일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한다*

젊은 시절 

뒤엉킨 세계에 들어가 쉼 없이 풀을 깎았고

마른 잔해가 구릉처럼 따랐다

남몰래 관목과 수목, 꽃밭을 날려버리고 

폐허에 서서 풀들의 이름을 부르며 

바르르 떠는 손을 주머니에 감추기도 했다

황량한 하늘 위로 

풀물 든 날들이 새떼처럼 

날고, 날고, 날아 

먼 산 노을이 불타는 시간 

노인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 뒤 

하천을 성큼성큼 빠져 나간다


다른 우주가 도래했다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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