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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애KAAE Nov 09. 2023

가족이 나의 가장 큰 빌런인 사람들에게 바치는 글

결국 내 인생은 내 것 임을 절대 잊어선 안된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하던가, 내 주변엔 항상 사연이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부모 가정, 아동학대 가정, 조손 가정, 장애인의 가족 등등등… 흔히 사회가 차상위계층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 그 표현을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내가 마주한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을 모아보자면, 우리는 모두, 가족이 빌런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어린 친구들이 얼핏 지나가다 가라도 꼭 보길 바라며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도움과 동정에 적응하면 안 된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낸 세금이 왜 돈 없는 사람들한테 쓰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그 앞에서 '당신과 당신의 부모님이 낸 그 세금이 저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 줬습니다.'라고 말하면 아직은 그 발언에 사과하는 사람만 만났다.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짜증 나고 분한데, 거기다 대고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결국 나는 내가 도움 받은 것들을 다시 베풀 거니까.

  우리가 받은 지원금과 물품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제도들은 우리와 우리 환경을 상상도 못 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낸 세금과 기부금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서.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이런 도움과 동정이 기꺼울 것이다. 우리가 처한 환경 특성상,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도움과 동정에 자주 노출 될 것이고 그대로 클게 분명하다. 그럼 자연스럽게 그게 당연하다고 적응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도움과 동정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내 환경이 나아지면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도움과 동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더 성장하기 위한 도움닫기다.

  도움과 동정에 적응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다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누군가가 도와주고 동정해서 내민 손을 잡아만 봤으니까.


  경제는 점점 어려워진다. 인구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수많은 통계가 앞으로 더 어려워질 거라고 이야기한다. 이 상황이 악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모두들 자신의 지갑이 얇아지면 호의에서 나오는 친절부터 줄일 것이며,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인구가 줄어들면 세수 확보가 힘들어질 것이 당연하다. (당연히 이에 대한 대책이 정부가 하고 있어야 한다. 세금은 복지정책에만 쓰이는 게 아니니)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도움과 동정은 한정자원이다. 다른 사람의 지갑과 마음이 풍족하다는 전제하에 발생하는 한정자원. 언젠가 그 한정자원이 소멸할 것을 대비해서 우리는 스스로들을 단련시켜놔야 한다.



상황을 역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문제들은 우리가 선택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우리는 지금의 환경을 빌미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제도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원들을 밑거름 삼아서 이용한다면 일부라도 우리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사업을 찾는 것이다.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영역의 지원 사업이 있고, 개 중에는 의외로 조건이 없이 굳이 우리처럼 문제가 많지 않아도 해당 지자체에 주소를 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공되는 지원사업도 있다.


  내 경험상 이런 지원은 어릴수록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수도권에 가까울수록 더 많았다. 정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환경을 바꾸고자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이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찾는지 모르겠다면 지자체의 SNS를 팔로우해놓는 것이 가장 편하다. 물론 공식계정에도 잘 안 올라오는 사업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땐 구글에 청소년 정책, 청년 정책이라고만 검색해도 대강의 사업이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라서 받을 수 있는 월세 지원정책을 받아 우리는 그만큼의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줄인 만큼 나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현금을 지원하는 정책들의 장점은 당장의 현금을 해결해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착각을 많이 하는 부분도 현금을 해결해 준다는 점이다. 현금을 받아 여유자금이 생겼다면 그건 그날 특별히 비싼 밥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만큼 자신에게 투자해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를 바라서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남는 현금만큼 취미생활에 투자하겠다?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바닥에서 벗어나서 살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그렇게 쓰지 않고 남들과의 환경차이를 메꾸기 위해 우리의 스펙을 채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동정을 받았고, 그것이 익숙한 상태이다. 그들 중 우리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는 얼마나 될 것 인가? 어느 하나도 미래를 걱정해 주는 말은 없다. 동정해 주는 사람들은 우리의 현재만을 보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우리 스스로 걱정해야 한다.

  ‘세이노의 가르침’에서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토할 때까지 일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건 나도 오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만들어놓은 것들을 무엇인가?  적어도 이건 해놨다고 주섬주섬 꺼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있는가?

  이제 나도 평범하게 지출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 체크하는 조건들이 있다.


1. 한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물건을 결제하고
다음 달의 나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던가. 그렇게 집에 돈을 보내도 내 통장에 남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신상품이 나와도 사기엔 부담스럽고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자 할 때도 돈이 먼저 걸렸다. 그래서 다음 달의 나에게 미루기로 했다. 나는 그게 카드였지만 (졸업하고 정식으로 취업할 때까지 한도를 30만 원으로 고정해 놓고 썼었다.)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저지른 일을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부분이다.


2.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가족을 챙기다가 가장 흔하게 하는 실수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족 뒷바라지를 하느라 내가 쓸 것과 공부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남는 건 남에게 소개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방치되고 멍청해진 '나' 자신이다. 지금의 나는 그리고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소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에 있어서는 두 번 다시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부은 시간도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에 한몫했음은 분명하니까.


3.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정당하게 일하고 있다.


  나는 "안녕하세요. 저는 개발자예요."라고 정확하게 직업을 뱉기까지 6년 여가 걸렸다. 그전엔 공장에서 일하는 작업자, 매장에서 일하는 판매직, 그냥 카페 /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학생. '그냥'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일하는 노동자이고 싶었다. 전산에 소득이 잡히지 않아 은행에서 대출을 승인해주지 않고 부러 서류를 만들어서 와도 겨우 몇백만 원을 대출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은행의 손을 안 벌리면 좋지만 은행에 손을 벌릴 수 있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아니까.



우리가 다 짊어질 필요도 없고 다 나설 필요도 없다.


  가족은 가족이다. 나는 나고.

  우리네 인생은 항상 고달프다. 우리는 어려서 글보다 눈치를 먼저 배웠을 것이고, 원하지 않게 얻어버린 빠른 눈치는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가족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도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처리하고 있을 것이며,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손가락질해도 근본 없는 책임감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도 우리한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러라고 태어난 게 아니니까. 지금은 자식이 자원이고, 효를 중시하던 유교의 시대가 아니다. 그걸 강요받으면 안 된다. 우리는 더더욱이.


  우리는 원할 때는 언제든 서류상의 가족으로만 남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라고. 내 가족 일이라서 당연하게 처리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내 이득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우리는 친구일에는 심장을 내어줄 정도로 감성적일지언정, 가족에게는 남 일 보듯 냉정해져야 한다.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그들이 이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물려받고 공유받았으며, 그저 당한 거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가족들로 인해 힘들게 살아남았지만 그만큼의 경력과 능력이 있다. 어딜 가도 살아남을 수 있고 더 잘될 수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더 잘될 수 있다. 가족들은 우리 자체가 아니라 이 상황을 해결해 주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꺼이 함께 이 짐을 나눠갖겠다는 가족이 있다면 사양하지 않고 나눠가지길 빈다. 정말 든든한 아군이 생긴 거니까.

  그리고 이 환경을 겪어본 우리야 말로 또 다른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사람임을. 누군가가 내가 낸 세금이 왜 돈 없는 사람들에게 쓰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모욕당할 때 나서서 아직 남아있는 또 다른 우리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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