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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Dec 26. 2024

밥의 동반자, 도시락 김

이름 없던 관계 

냉장고에서 꺼내기만 해도 자잘한 반찬으로 식탁이 가득하다. 한 가지 반찬을 다 먹어치우지 않고 새로운 반찬을 매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오늘도 먹을 게 하나 없는 밥상인가 보다. 맥없이 식탁을 돌아보다가 슬며시 찬장에서 포장 김, 즉 도시락 김을 꺼내신다.      


한여름과 마찬가지로 음식 하기가 힘든 나날이다. 가스를 사용하다 보니 환기도 해야 하는데 일 년 내내 즐겨 먹는 생선을 구울라치면 냄새와 연기를 감당할 수 없다. 웬만한 음식은 불을 쓰지 않고 전자레인지로 조리한다든지, 아예 반찬류를 사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올 겨울 들어서는 특히 도시락 김이 매끼 식탁에 오른다. 아무리 상에 반찬 가짓수가 많아도 엄마는 습관적으로 도시락 김 하나를 보탠다. 나 역시 어쩌다 바쁘고 힘들 땐 도시락 김만 두세 개 뜯어 밥을 먹은 적도 있다. 덕분에 도시락 김을 사다 놓기가 바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도시락 김 가격이 부담스럽게 올랐다. 요즘 물가가 다 비싸긴 하지만 예전에는 도시락 김 하면 만만한 반찬이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요즘 김 가격이 상승한 이유가 있었다. 

놀랍게도 해외에서 김 제품이 인기가 있어 김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고 했다. 내 평생 외국인과 도시락 김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가격이 제일 싼 김이나 행사 상품 위주로 장을 봤다. 그랬더니 엄마가 귀신 같이 알아채고 불평을 하셨다. 어떤 김은 맛있는데 어떤 김은 뻣뻣하니 싸구려 같다고.     


친구 하나 없던 고3 시절, 도시락 먹을 때가 제일 난감했다. 그나마 밥 먹을 때 옆자리 짝과 그 친구의 무리에 섞여서 다행히 외톨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짝과 그 무리들은 대놓고 노는 축은 아니었지만 딱히 공부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나는 노는 학생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 몸만 버스에 실려 왔다 갔다 하는 영혼이었다. 사실 그게 제일 나쁘다.


짝은 학교에 오면 주로 엎드려 있었지만, 깨어 있을 때는 소탈하고 선량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을 때면 늘 똑같은 반찬을 싸왔다. 밥에 장아찌 같은 밑반찬과 도시락 김 한통. 그런데 그 도시락 김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도대체 어디서 파는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상표를 달고 있었다. 

나는 늘 그 김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있었지만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사실 그 친구는 옷도 매일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깡마른 체구까지 온몸에서 어려운 분위기가 풍겼다. 짝의 아버지가 작은 공장을 하다가 망해서 집안이 쪼들린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그 친구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왜냐면 우리는 진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짝은 반에서 겉돌 뿐 아니라 심한 우울증 증상까지 보이며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나에게 상냥히 대해 주었다.

하지만 집과 학교는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불만스러웠던 내게 바캉스 철이 한참 지난 시기에 야자수가 잔뜩 그려진 남방을 입고 학교에 오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생긴 짝이 마음에 들리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의 길은 갈라졌고 그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참기름 김’, ‘들기름 김’. ‘매생이 김’, ‘감태 김’. ‘파래 김’ 같은 다양한 도시락 김 종류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불현듯 고 3 시절의 그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 역시 나를 대단한 단짝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고 아마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흑역사 같았던 고등학교 시절은 그때의 다짐과는 달리 가끔씩 그립다.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웬일인지 짝까지 그립지는 않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명랑 쾌활했던 그 친구와 나의 인연은 그냥 한 시기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본다. 어쩌면 ‘이름 없는 도시락 김’을 나눠 먹은 딱 그 정도의 우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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