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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넬 Sep 09. 2024

우리 사이는 '단골'입니다

회사 근처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매장에서 비빔밥과 덮밥 종류를 주로 파는 음식점이다.

비교적 가격 저렴하고 간 과하지 않으며, 혼자 가도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 일인석으로 되어 있어 자주 찾는 집이다.

그날도 퇴근하다 혼자 간단히 때울 겸 김치볶음밥을 먹고 나오는 길인데,


"저기요"


하며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긴다. 방금 나온 식당 사장님이다.


거의 3년 가까이 식당에 방문했지만 난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항상 마스크에 위생모를 쓴 모습이라 식당 밖에서 마주쳐도 알아볼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사장님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자주 오시는데 쿠폰도 안 쓰시고, 이번에 저희가 가격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거라도 써주세요."


하며, 도장란을 가득 채운 쿠폰을 내민다.


"아닙니다. 저는 가까운 곳에 사장님 가게가 있어 맛있는 음식 자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장사 잘 되셔서 오래도록 이 자리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하며 괜찮다고 하는데도 한사코 내 손에 쿠폰을 꼭 쥐어주시곤 씩씩하게 매장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사장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분과 나의 관계는 '단골'이다.


단골이란 말은 호남 지방의 무속신앙에서 유래했는데, 굿 할 때 항상 부르던 무당을 당골무당이라고 칭했다.

점차 무속신앙이 힘을 잃으면서, 일반적으로 자주 찾는 손님 또는 가게를 모두 단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단골'이란 관계는 어쩌면 '친구'와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대등한 관계로 구속력이 없다.


다만 자주 찾는다는 것이 꼭 단골의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칼국수 집을 운영하시는 어떤 사장님은 단골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을 본인들이 돈을 쓰니 대단한 사람이 된 양 해석하는 분들이 있다.

당연한 듯이 가격을 깎아 달라거나 양을 많이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인테리어나 식당 운영 방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자주 찾아오는 진상이라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니 단골이라는 말은 '자주 거래하며 서로 호감을 느끼며 친해진 사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쿠폰을 받은 덮밥집 근처에 자주 가던 단골집이 하나 더 있었다.


'아궁이'란 이름으로 옆 건물 귀퉁이에 작게 연 식당인데,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사장님의 성격이 워낙에 붙임성 있고, 몇 번 온 손님들의 사소한 부분들을 기억해 주는 점이 그 비결이었같다.


사장님과 다른 손님들이 활발히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다른 손님들과도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곤 한다. 친한 친구의 다른 친구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함께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랄까?


심지어 전혀 연관이 없던 단골들끼리, 자리가 붐비면 합석해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항상 식당이 꽉 차고 5분~10분 정도의 웨이팅이 기본이었는데,

가장 작은 테이블에도 한 명만 앉기엔 눈치도 보이고 다른 단골손님의 대화를 몇 번 듣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증도 생겼던 탓이다.



그러던 단골집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도시락을 챙겨 다녔고, 출장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3주 정도 발길을 끊은 사이였다.

오랜만에 깜짝 방문해서 생각나던 잔치국수도 먹고, 근황 얘기도 할 생각에 들떴었는데,

불 꺼진 식당의 잠긴 문 앞에서 허탈함과 미안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자주 못 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전할 방법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생각했지만 아는 것은 상호와 가게 전화번호뿐, 나는 그분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 새삼 친구와 단골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길을 가다 우연히 다른 단골손님을 마주쳤다.

근처에서 부동산을 하시는 사장님이셨는데, 한 번 합석도 하고 명함도 교환했던 사이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차라, 도대체 단골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여쭤봤다.

단골집 사장님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셔서 급하게 매장을 정리했고 다른 곳에서도 다시 오픈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연락처를 여쭤볼까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도 모르실 것 같았고, 안다 해도 알려주기 껄끄럽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단골집 사장님이 연락을 받는다고 해도 날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까?

제육덮밥이랑 잔치국수 즐겨 먹던 혼자 자주 오던 청년입니다라고 해야 할까?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단골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자주 방문하고, 단골집 귀책이 아닌 내 사정으로 자주 못 가게 되면 오해하지 않게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자주 찾던 단골집 들에는,

"제가 요새 건강상 다이어트를 하느라 당분간 자주 뵙기 어렵습니다. 얼른 목표 달성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올게요."


하고, 미리 말해 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왜 내가 급격히 살찐 이유는 단골집들이 대부분 고칼로리, 고지방 음식이어서가 아니었나?!

불현듯 내 단골집들 주메뉴가 뭐였나 하나씩 곱씹어 보게 된다.

내 단골들과 계속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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