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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넬 Aug 14. 2024

마포대교에서 만난 제제

별 다른 스케줄이 없던 한가한 오후였다.


유유자적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포대교를 넘는데,

방금 전 횡단보도에서 두어 번 마주친 꼬마친구가 저기요, 하 나를 부른다.


당근으로 '전동건'을 사러 여의도에 가는 길인데, 길을 잘 모르겠다며 여의도까지만 같이 가달라고 한다.

어차피 집으로 급하게 돌아갈 이유도 없고, 예의 바른 어린 신사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속도를 조금 맞춰줬더니, 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따라오더니


"속도 좀 내주세요. 저도 따라갈 수 있어요."


하며 큰소리를 친다.


마포에서 여의도가 그리 멀진 않지만, 중간중간 차량이 합류하거나 우회전하는 구간이 있어 어린아이가 혼자 다니기엔 여간 위험한 게 아니다.

걱정스러운 한 편 대견하기도 해서 몇 살이냐 물어봤더니 열두 살이라고 한다.



전동건은 장전하면 스펀지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총알이 나가는 장난감으로, 90년대에 내 또래 아이들이 갖고 놀던 BB탄 총보다는 훨씬 안전한 것 같았다.


동생이랑 이걸로 휴지심을 맞추는 내기를 자주 하는데,

동생이 본인 총을 탐내길래 줘버리고 본인은 모아놨던 용돈으로 당근 거래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가방 안을 보여 주는데 천 원짜리 지폐가 한가득이다.



당근 판매자는 내 꼬마친구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자신의 아버지 손을 꼭 쥐고 나왔다.

판매자의 아버지는 같이 자전거를 타고 온 나를 꼬마친구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는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얼른 인사를 받으며 우리 꼬마친구의 면을 세워주기로 했다.

어색해하는 판매자가 전동건에 대해 퉁명스럽게 설명해 주고, 꼬마친구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나는 자녀가 혼자 거래를 마치도록 지켜봐 주는 아버지처럼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며 서 있었다.



꼬마친구는 구매한 전동건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부분 반품을 요구했다가,

판매자의 어머니가 불허하자 그래도 자신이 이득이라며 혼잣말을 하더니 야무지게 총을 분해해 가방에 담고 거래를 마쳤다.



꼬마친구가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나에게 고맙다며 음료를 사겠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여의도에서 마포대교까지 오는 길에는 편의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어린 친구에게 대접받을 뻔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포대교 앞에서 꼬마친구와 작별 인사를 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씨익 웃음이 났다.

내가 가끔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기도 했지만, 이번처럼 번거로움을 잔뜩 감수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릴 적 읽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뽀르뚜가의 심정이 이랬을까?

평범한 아저씨도 얼마든지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과 함께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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