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카이지>
작년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순위를 달리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영화 <카이지> 표절 관련해서 일부 미디어 보도가 있었다. 평등 사회에 대한 갈망과 인생을 재부팅하려는 희망을 게임이란 프레임을으로 그려낸 두 작품은 비슷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한 번쯤 해본 게임을 소재로 선택한 것은 "평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영화 <카이지> 시리즈 두 편을 다시 봤다. 10여 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세월의 경과를 느낄 수 없었다. 빈부의 격차와 빈곤의 절망, 부의 축적, 성공한 인생 등은 10년 전이든, 10년 후든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영화 <카이지>는 분명 사회에서 성공하지 않은 패자들이 모여 다시 한번 인생의 재건을 하고자 참석한 멤버들이다. 단 한 명 한 명 캐릭터의 인생과 왜 이 게임에 참석해야 하는지 당위성과 설득력이 분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과 동감을 썩 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게임 주최자는 분명 악인 집단이지만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이가 없다. 단순한 노동력 확보와 지하세계 건설과 유지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엔 '악의 보편성'을 찾기 어렵다. 물론 만화 원작에 충실해야 하는 제작과 권리 시스템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엔터테인먼트의 성공은 결국 공감과 세계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최종 게임은 게임 룰을 이해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심리, 설정, 긴장감 등을 다 포함하기엔 관객 입장에서는 너무 벅찼다. 그리고 왜 그 게임이 최종으로 설정되어야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수긍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과 어떻게 다른가? 시청자로서 <오겜>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 게임으로 게임 자체의 이해가 필요 없었다. 물론 외국인이 보면 게임 룰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게임 자체가 너무 단순했고 승자와 패자의 판단도 누구나 심판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참석한 한 명 한 명의 캐릭터 묘사와 참가 배경이 공감과 동정을 불러왔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탈북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 폭력배, 그리고 사회 저층 등 왜 이 게임 집단에 참석하게 되었는지, 사회의 외면과 멸시는 등장인물들에게 공통적인 아픔이었다. 그리고 잔인한 게임을 만든 주최 인물도 결국 처음부터 게임에 참여하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게임의 프레임을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보편성과 사회적 부조리, 그리고 미래의 인간사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누구든 납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020년은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2021년은 <오징어 게임>, <지옥>, 그리고 2022년은.....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까지 참 많은 시도와 실패와 성공이 있었다. 세계의 보편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공감과 설득의 스토리텔링, 대화가 아닌 영상과 시추에이션으로 스토리 맥을 잡아가는 노력 등이 대단하고 뿌듯하다. 한국 드라마는 대화 오디오를 끄고 들어도 영상과 음악, 그리고 시추에이션, 표정 등으로 충분히 줄거리와 메시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연수 때 대선배가 했던 말이 생생하다. 영국의 대표 애니메이션 <꼬마 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 이 완성되기 전에 프로트 타입을 제작 후에 모니터링을 했다고 한다. 유아 몇 명을 한자리에 모아 두고 오디오 없는 묵음의 애니메이션을 보게 한 후 몇 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집중해서 시청하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정확하게 몇 분 이상이었다는 건 기억나지 않지만 소리도 없이 영상만으로 충분한 집중력을 끌어낸 작품이었다고 했다.
하루에 영상을 접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TV 앞에서만 보는 게 영상이 아닌 시대이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다.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 국제적 보편성을 끌어내고 공감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런 의미에선 게임 프레임을 활용한 두 작품의 참신성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