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오위 Feb 26. 2022

중국어 공부 15년 차입니다

애매한 능력으로 승리하는 법

다이어트로 10kg 감량 후 바디 프로필 찍기, 유튜브로 수익 내기, 한 달에 책 다섯 권 읽고 블로그에 리뷰하기, 영어 공부 다시 시작해 프리토킹 하기. 지금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 본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가상 새해 목표이다. 건강, 경제와 더불어 자기 계발 카테고리에 빠지면 섭섭한 외국어 공부. 사람마다 목표로 하는 외국어는 다양하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괘씸한 영어를 포함해 코로나가 끝나고 떠난 여행지에서 언젠가는 사용하게 될 제2 외국어까지. 그러나 새해 결심들이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우리는 여러 차례의 시도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결국엔 어떻게 될지 알면서 멋모르고 덤벼드는 불나방처럼 나도 1월이 되면 연례 의식처럼 새해 목표란 걸 세운다. 거의 모든 해의 리스트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건 중국어 공부. 비록 중문과를 복수 전공했고 한때 중국어 교육으로 석사까지 했지만 놀랍게도 중국어랑은 아직도 데면데면한 사이다. 헷갈리는 성조와 획수가 복잡한 번체자를 쓸 생각을 하면 만날 때마다 나를 귀찮게 구는 사람처럼 그저 피하고 싶다. 그냥 중국어 공부 안 했다 치고 다시 영어를 공부할 의향도 있다. 그런데 벌써 15년이나 지겹게 중국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안 놓아주고 있다. 이쯤이면 질려서 포기할 법도 한데 함부로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중국어가 나의 밥벌이 수단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대만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나는 유창하지는 않지만 대만인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그럭저럭 입에는 풀칠할 정도의 중국어를 구사한다. 한국어 선생인 나에게 요구되는 중국어 실력은 천만 다행히 통번역 수준의 고급 중국어가 아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기초 학생들에게 기본 문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중국어로 말하는 학생들의 질문을 알아듣고 대답해 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중국어로 된 한국어 문법 책을 읽을 수 있고 중국어로 학생에게 배부할 핸드 아웃을 만들 수 있으면 내 수준의 엉터리 중급 중국어도 별 무리가 없다.


비록 고급 중국어까지는 필요 없으나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중급 수준의 중국어 실력을 유지하는데도 꽤나 버겁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국어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한다. 하나 남은 끈마저 놓아 버리는 순간 중국어 실력은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 영어가 이를 대변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꽤 많은 돈을 투자해 일대일 과외를 받아 보기도 했고, 유명한 중국어 전문 교육 기관에 한 학기 신청을 해서 수업을 들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은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극도로 개인적인 성격과 직업병에서 기인한 괴팍한 공부 성향이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같이 스터디 모임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다. 어차피 혼자 해야 하는 공부 왜 굳이 단계를 하나 더 늘려서 타인과 그 과정을 공유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다. 대학생 때는 조별 과제가 너무 싫어 일부러 조별 과제가 없는 수업을 골라서 들을 정도였다.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다. 이렇듯 심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를 7명 정도의 소규모 중국어 수업에 억지로 끼워 넣는 순간 매 시간이 견딜 수 없게 된다. 교사로서의 나와 학생으로서의 나, 이 두 자아가 매 수업마다 피 터지게 싸운다.


외국어 수업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발언 기회를 주는 게 필수적인데 교사로서의 나는 그 시간을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학생으로서의 나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버린다. 특히 중국어 발음이 안 좋은 학생이(서양인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도 맞지 않는 문법으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걸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서양인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대부분 말이 많다) 내가 이 돈을 내고 왜 쟤 말을 듣고 앉아 있어야 하나 하는 현타가 올 때가 많다. 다른 학생의 발화를 통해 학생 간에 서로 배우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선생으로서의 나는 이해를 하지만 학생으로서의 나는 그런 교육이론 따위 개나 줘라는 심정이다.     


한국어 선생이라는 직업병도 한몫한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강의 내용은 뒷전이고 선생님의 교수법에만 온통 집중이 쏠린다.'지금은 도입 단계이군. 오늘 유의미 연습은 건너뛰는가? 여기서 정보차 활동을 하면 좋을 텐데...' 수업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의 강의를 듣고 나면 제발 평가질 좀 하지 말자, 나나 잘하자는 쓰디쓴 자아반성과 자기비판만이 내 머릿속에 남을 뿐.


그렇다면 나를 가르친 중국어 선생님 입장에서 나는 어떤 학생이었을까? 아마도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학생이었을 것이다. 숙제 안 해 오고 자주 지각하고 조별 활동에 불성실하고 시험 준비 잘 안 하는 태도 불량한 학생. 나도 나름의 변명 거리는 있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중국어 수업을 3시간 정도 듣고 바로 출근한 후 7시간 연강을 하면 저녁이면 지쳐 나가떨어진다. 나에게는 결코 숙제, 조별 활동, 시험 준비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냥 아침 9시에 교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도 직장인 학생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게 되었고 그들에게 좀 더 관대해졌다.


그 이후로 일대일 과외로 눈을 돌렸지만 이것도 몇 번을 시도해 보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나에게 맞는 선생님을 못 찾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고 또 일대일 과외를 꾸준히 들을만한 경제적 여유도 부족하다는 것도 포기를 한 이유 중 하나이다. (써 놓고 보니 슬프네) 결국 오랜 기간 이런저런 방법을 적용해 본 끝에 현재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공부 방법은 매일 시간을 조금씩 투자해 나 혼자 공부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어 초보자가 아닌 중급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공부 방법이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각자 구사 가능한 외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공부할 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딱 30분씩만 하는 중국어 공부


교재는 따로 없다. 꼭 중국어 공부 책을 보지 않아도 된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내용을 정해 정말 짧게 30분 정도 공부를 한다. 요즘은 한국어 수업 시간에 가끔 다루는 시사용어를 중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공부한다. 그리고 가끔은 인스타그램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SNS로 중국어를 공부하면 '정주행, 본방사수, 막장 드라마'같은 다양한 신조어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신조어들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주의를 끌 때 사용된다. 이렇게 나만의 공부 내용을 정해 혼자 공부한 지 벌써 몇 년째다.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미친 듯이 하루 종일 중국어 책을 붙잡고 씨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무식하게 양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공부 단계가 이미 지나버렸다. 중국어 실력이 매일 일취월장으로 늘어 공부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지난한 무한루프와 같은 단계인 것도 알고 있다. 하루에 많아봤자 단어 10개, 아주 적은 양을 공부하기 때문에 가끔은 하나도 안 느는 것 같고 단어 몇 개 외워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의 학생들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개미 눈곱만큼 매일 공부한 결과가 나중에는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한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 선생님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왔다. 사실 천부적인 외국어 능력이란 건 실재한다. 잘하는 학생은 딱 보면 떡잎부터가 다르다. 스펀지처럼 빨리 흡수하고 금방 응용을 한다. 남들이 일주일 걸릴 걸 이들은 야속하게도 하루 만에 마스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결국엔 누가 한국어를 잘하게 될까? 교사 생활 초기엔 비범한 언어 재능을 가진 학생이 한국어를 잘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대 그런 학생을 몰래 편애하기도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한국어를 잘하게 되는 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학생들이었다.


신기하게도 학생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 말하기를 잘 못하는 학생이 작문을 해 온 걸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원래 이 정도로 잘했던 학생인가 싶다. 철자 하나 맞지 않는 엉망인 작문을 해 오는 학생은 넉살 좋게 이것저것 응용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다. 내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각자 부족한 부분을 알아서 잘 채우며 공부를 한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학생도 있다. 이것도 애매하고 저것도 애매한 학생들. 그런 학생들은 바보처럼 열심히 한다. 숙제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출한다. 고칠 게 산더미인 숙제지만 해 오라는 숙제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관성의 법칙을 온몸으로 수행하는 사람처럼 수업 시간에 앉아서 태어날 때부터 매일 해 왔던 일처럼 수업을 듣는다. 듣고 보면 비웃을 수도 있다. 바보처럼 열심히만 한다고. 수동적인 데다가 비효율적인 공부 방법이라 전혀 실력이 안 늘 것 같지만 이 무식한 공부 방법이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면 나중에는 빛을 본다. 결코 애매한 능력이란 건 없다.


전에 어떤 분이 물어본 적이 있다.  가지 언어를 5년간 배우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왠지 한국 회사에 다닐  같고 애인이 한국 사람이거나 한국 아이돌에 미친 사람들이 오랫동안 수업을 들을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5 , 한국 아이돌 팬들, 남자 친구가 한국인이었던 ,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으 구성된 기초 수업을 열었다. 처음엔 당연히 이런 학생들이 한국어를 월등히 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씩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학생들이  수업에서 나가고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반은 한국어 고급반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운영이 되고 있다. 결국 어떤 학생들이 남아서 고급 한국어를 배우고 있을까?

 

5년 동안 한국어를 배워오고 있는 학생들은 누구의 팬도, 한국 회사 직원도, 한국 사람의 애인도 아니다. 그저 일상 속에서 나만의 작은 성취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외국어를 배우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일주일 단 하루, 퇴근을 하고 세 시간의 한국어 수업에 빠지지 않고 오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 그런 학생들이 남아 아직도 나와 같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애매한 능력으로 초반에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학생들이었다. 지금은 어떻냐고? 한국어로 노 키즈존과 관련된 뉴스를 보고 자기 생각을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저번 주 수업에서는 한국어로 동물권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토론을 진행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한국에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런 학생이 나와 한국어로 조잘조잘 수다를 떤다.  


인생에 거창한 목적 같은 거 없어도 된다. 중국어로 프리토킹 못해도 된다. 여행 가서 메뉴판 보고 주문하고 길만 안 잃어버리면 된다. 굳이 대단한 수영 선수가 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우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법한 작고 보잘것없는 꿈을 가지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매일 조금씩 나만의 작은 성취, 작은 행복을 위해 바지런히 움직여 보자. 매일 30분씩 단어 10개 외우기. 일주일에 한 번하는 수영.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게 1년이 되고 3년이 되고 5년이 되면 분명히 달라진다.


자신을 위해 매일 사부작 거리며 끊임없이 뭔가 하는 애매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일상의 작은 해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결국에는 승리한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보니 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