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사회적인 혹은 내면적인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한 행복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

by 세랑

"페르소나", 인간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어찌보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을 우리의 본성이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가 확연히 다른 본 작가에게는, "페르소나"로 비롯된 행복과 내 스스로 찾는 행복(일명 소확행!)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두 상황에서의 나는 분명 행복하지만, 내 내면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또 고민에 빠졌다. 그 두 상황 속에서의 행복이 같을 수 있을까?


인간의 사회적 행복과 본질적인 행복이 동일하다면, 인간은 내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행위를 통한 행복 실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인간은 타인의 시선의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 본질적인 행복의 정의는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회적 행복과 본질적인 행복은 결국 동일한 행복이 될 수 없으며,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회적 행복에 가깝게 본질적인 행복을 변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행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어떤 것으로서,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다. 따라서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 선택되는 활동 중 하나여야 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 중 하나여서는 안 된다. 결국, 행복은 다른 것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선택하는 최종적인 목적이며,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상태이다.’

즉, 행복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 등의 미덕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중용을 깨닫고, 그 이후 행복을 위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이야기한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그리고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는 좋은 환경과 외적인 유복함을 들고 있다는 점을 보아, 외부의 환경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의 완전한 실현에 영향을 분명히 끼친다는 점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의 기반이 되는 그 밑바닥에는 도덕적 미덕과 지적 미덕이 존재하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도덕적 미덕(절제, 후함 등)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받아들여 습관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적인 미덕(철학적 지혜, 실천적 지혜 등)은 교육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환경과 그에 따르는 노력에 따라 인간의 내적인 행복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행복이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외부의 환경에서 변화되는 측면도 상당히 많다. ‘행복하지만 슬프다’라는 말이 이를 잘 표현한다. 사회적으로 행복하다고 여겨지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말한다.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어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를 통해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페르소나(The Persona)란, 개인의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거나 자신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며, 쉽게 말해 사회 상황과 사회 관습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다. 즉, 이는 공적인 상황에서 발현되는 자아이기에, 내면적 자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두 자아가 추구하는 행복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융도 페르소나는 참다운 것이 아니며, 그저 사회와 개인이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서로 타협하여 얻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연결해보면, 행복은 미덕의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고, 그 기준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아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면, 과연 그 기준도 일관성 있다고 볼 수 없다. 만일, 본질적 행복이 페르소나 중 하나의 행복과 동일시된다면, 그것은 ‘집단이 추구하는 행복’이며, 자신의 내적인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의 좋음을 행복 중 가장 높게 평가했는데, 페르소나로 인해 벌어지는 혼의 분열은 이것을 결코 이룩할 수 없게 만들며,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잃게 한다. 즉, 인간의 최고선인 행복을 추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또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적 행복과 사회적인 행복은 동일한 행복으로 느껴지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페르소나의 행복으로 동일시된다면, 이것은 분명 우리의 내면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될 것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자신이 했던 활동조차 무의미한 활동이 되고, 인간으로서 느끼는 행복 자체의 가치를 더욱 상실시킨다. 반대로, 행복이 내면적인 행복의 방향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사회적 관념과 시선, 그리고 외부의 압력을 모두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영혼과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이면서 ‘정치적’ 동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과 관계에서 완벽하게 떨어져 있는 삶을 살긴 어렵다. 그렇기에, 내 내면에만 집중하는 행복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두 상황을 빼고 나면, 사회적 행복과 내면적인 행복이 같아질 수 있는 방법은 이론상 없다. 그러나, 우리가 "페르소나"를 쓴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같은 존재일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행복의 정도도 같아지지 않을까?


사회 속에서도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더 잘 알아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