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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Aug 28. 2022

어쩌다 회계가 내 인생에..!

아주 빠르게 정해진 전공

나는 현재로부터 너무 먼 미래는 잘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살면서 어느 하나에만 특별히 '더'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이것도 재미있고 저것도 나름 재미있는걸. 그러다 보니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뭐니?" 하는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게 적잖이 어려웠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그랬다. 딱히 어떤 특정한 학문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 사회에 제대로 발을 디뎌보지도 않은 내가 아는 직업이라곤 변호사, 의사, 선생님 등 TV에 나오는 익숙한 직업들, 그리고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직업들이었다.


입학 당시 2학년까지는 대부분 교양과목만 듣기 때문에 전공을 바꾸는 게 쉽다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많이들 선택하는 경영학부에 들어왔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수업을 듣다 보면 그중에서도 특히 더 재미있는 뭔가가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학교는 1-2학년 때는 들어야 할 수업 코스가 이미 어느 정도 짜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는 수업은 기껏해야 학기당 하나 정도의 선택교양 수업이었다. 


어찌나 다양한 과목으로 1년을 구성해놨던지 Geography, World Civilization, Calculus, English 등의 다양한 수업을 1학년 때 꼭 들어야 했는데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짠 하고 나타나 줄 것만 같던 '특히 더 재미있는' 수업은 운명처럼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다.


3학년부터는 전공을 무조건 정해야 하기 때문에 2학년 때는 회계, 금융, 통계, SCM 등 경영학부 내에서도 세부 전공으로 나눠지는 것들의 기초과정을 꼭 한 번씩은 듣도록 수업 구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에 'Introduction to Financial Accounting(회계원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운명의 짝을 만난 기분이었다.


회계사라는 직업이 뭔지, 정확히 뭘 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수업을 들을 때만큼은 재미가 있어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다른 수업들과 달리 회계 수업은 친구들 사이에서 유달리 호불호가 갈렸다. '재미있다'라고 하는 친구들과 '너무 안 맞는다'라고 하는 친구들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분개의 차변과 대변이 딱딱 맞고, 그렇게 만들어진 재무제표를 이해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정답을 좋아하는 내 성향에 어쩐지 쏙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회계학이라는 전공을 찜 해두고 2학년 2학기가 되었다. 2학기에는 'Introduction to Managerial Accounting(원가회계)'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했다. 부모님이 잠깐 식당을 하셨을 때 옆에서 흘려듣던 재료비니, 인건비니 하는 것들을 실제로 배우고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꽤나 흥미로웠다. 재미있으니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니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적이 잘 나왔고 어느 날 교수님이 날 방으로 불렀다.


유학생 출신인 중국인 교수님이셨는데 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전공은 정했냐고 물어보셨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난 이미 마음속으로 정했어. 앞으로 너의 전공은 어카운팅이야"라고 대답하셨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여쭤보니 본인 눈엔 내가 회계학을 엄청 좋아하는 걸로 보인다고 하셨다. 끝끝내 좋아하는 전공을 못 찾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즐길 수 있는 학문을 찾은 건 행운 아니냐며 이 행운을 그냥 날려 보내지 말라고 하셨다. 덧붙여서 본인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minority로 살아보니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이지만 아시안이 '잘한다고 인식되는 것'을 하며 사는 것도 꽤나 도움이 된다는 조언이었다.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숫자에 강하고 손재주가 좋다고 인식되는 아시안들이 비슷한 이유로 많이들 선택하는 전공은 간호학, 치의대, 회계학, 데이터 분석 등이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하는 말씀들이 어느 정도 공감이 됐고, 듣다 보니 내가 회계를 재미있어하는 걸 넘어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한 채, 나의 전공은 너무나도 쉽게 정해졌다. 사실 그 하루가 나의 20대 전체를 결정해버렸기 때문에 가끔 '너무 생각 없이 전공을 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발견당한 재능이 실제로도 잘 맞았으니 발견해 주신 교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우연히 재미있는 전공을 찾은 덕분에 학교도 방황 없이 졸업할 수 있었고, 동양인이라고 차별받지 않는 회계법인에서 첫 사회생활도 무탈히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견당함으로써 우연히 정해진 전공이 잘 맞았던 경험을 해보고 나니 새로운 도전을 해 볼 때도 '이것도 의외로 잘 맞을 수 있지 않겠어?' 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열린 마음으로 흥미에 주목하며 살다 보면, 또 어떤 재미있는 일들을 우연히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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