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만 백날 넣어봐야..
오늘은 미국 취업의 필수 관문인 네트워킹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한다.
외국인의 신분으로도 취업이 잘 된다 하여 회계학 전공을 선택했지만, 막상 취업 준비를 시작하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대학 3학년 전공수업이 시작되기 전, 이미 많은 미국 친구들이 2학년 여름방학 때 빅4 회계법인에서 인턴 경험을 했고, 다음 썸머 인턴 오퍼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8월에 새학기가 시작하고, 9월부터 바로 또 네트워킹 이벤트가 줄줄이 열렸다. 여기서 현직자들 혹은 리크루터들과 네트워킹을 제대로 해야 다음 인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이벤트에 참석했다. Accounting, Finance 관련 수십 개의 회사들이 부스를 세우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종이 치자마자 활발한 성격의 미국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순식간에 줄은 길어졌고 차례를 기다리는 그 마음은 어찌나 초조했던지. 들어보니 날씨, 야구, 풋볼 얘기 등 가벼운 스몰 톡(small talk)이 오가는 것 같아 더 불안해졌다.
'어쩌지? 난 스포츠에 관심도 없는데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하나?'
초조해하던 사이 내 차례는 왔고 스몰 톡이 두렵던 나는 어렵게 온 내 순서를 뻥 걷어차버렸다. '도망'이라고 표현해야 더 맞겠다. 겉도는 얘기들만 나누다가 회사 굿즈들만 잔뜩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이벤트가 끝나고 얼마 후, 또 몇몇 친구들이 썸머 인턴쉽 오퍼를 받았다. 그날 그 네트워킹 덕분이라 했다. 앉아서 공부만 할 줄 알았던 소극적인 아시안 학생이었던 나는 성적만 잘 받고 있으면 졸업 후 알아서 취직이 되는 건 줄 알았다. 당시엔 간단한 아르바이트 말고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었으므로 누군가 나를 추천해 줘서 취업을 한다는 건 어쩐지 정공법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고 외향적인 친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같은 걸로 여겼다. 학기 내내 열심히 놀던 친구들이 네트워킹을 통해 뉴욕 큰 회사들의 자리를 꿰찰 때면 그들이 노력에 비해 쉽게 취업하는 것 같아 어쩐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또한 스포츠, 취미 생활 등의 가벼운 주제로 다가가지만 결국 이 네트워킹의 끝은 '너를 통해 리퍼럴(referral, 추천)을 받고 싶어'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주위에서 교수님도, 친구들도 이력서만 백날 넣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정말로 미국에서 취업을 하고 싶다면 네트워킹은 필수라고 수도 없이 얘기했지만 '아니, 나는 정면으로 부딪혀 볼 거야' 하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3-4학년 무려 2년을 허비했다. 2년 동안 혼자 67군데의 포지션에 지원을 해봤지만 돌아온 인터뷰 기회는 0. 이제는 고집을 내려놓고,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쩌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냥 나의 comfort zone을 벗어나 네트워킹을 하기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4학년의 어느 날, 링크드인으로 어떤 중국인 학생에게 장문의 메세지가 왔다. 어느 과 몇 학년의 누구누구이며 이런 걸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며 내가 경험을 해봤으니 조언을 해줄 수 있겠냐는 메세지였는데 구구절절 쓴 내용이 나도 고민을 해봤던 내용들이라 어쩐지 나서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카페에서 만나서 알고 있는 내용들을 흔쾌히 다 알려주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우리는 그 후로도 자주 만나 커피타임을 가졌다.
'잠깐, 이게 결국 네트워킹 아니야?'
어느 날 그 친구와 얘기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내게 뭔가 크게 바라는 게 있어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의 링크드인 메세지를 보고 별생각 없이 선뜻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교내의 이런저런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있었는데 우리의 이 관계를 한 발자국 물러나 살펴보니 결국 내가 그리도 거부하고 있던 네트워킹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마음속으로 '네트워킹은 취업하고 싶어 "억지로" 관계를 형성하는 형식적인 일이야'라는 공식을 정해놓고 나니 모든 게 비뚤게 보였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만드는 관계'라고 치부해 버리니 대화 주제도 더 안 떠올랐던 것 같다. 네트워킹을 외향적인 사람들만의 전유물로 판단해버린 것도 큰 오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활달한 성격이 높게 사진 게 아니라, 회사, 그리고 직무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열정"이 높게 사진 거였는데 나는 큰 오해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 후로는 현직자 및 리크루터와의 네트워킹을 취업을 위한 인맥이 아닌, 이 친구와 나의 관계처럼 단지 궁금한 게 많은 사람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줄 수 있는 사람의 멘토-멘티 관계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궁금해야만 할 것 같은 질문들'이 아니라 '내가 진짜 궁금한 것들이 뭐지?' 하고 생각을 하니 직무에 대해, 그리고 회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차차 쌓여 갔다.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이 시작하기 전 세 달 정도가 붕 떴다. 6월 한 달은 커리어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추려 보았고 7월 한 달은 링크드인을 열고 매일 다섯 명 정도에게 콜드 메일을 보냈다. 진로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들이 있어 커피챗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거의 열 명 중 한 명 꼴로 아주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고, 뉴욕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여섯 명의 현직자들과 대면 커피챗이 어레인지 되었다.
(*뉴욕주는 회계사 라이센스를 따기 위해 150학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부 졸업 후 바로 1년짜리 석사 과정을 밟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8월의 어느 날 8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버팔로에서 뉴욕으로 내려갔다. 그 여섯 명을 만나기 위한 투어의 이름은 말 그대로 "네트워킹 투어". 뉴저지에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고 매일 한 명씩 만나러 다녔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본인의 일에 대해, 그리고 회사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도 어느정도 중심이 서는 것 같았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도 조언을 주는 입장에서 커피챗을 몇 번 해보니 결국 조언을 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진심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내 커피챗 요청에 응해줬던 것 같아 마음의 짐이 어느 정도는 덜어졌다.)
2년간의 마음고생 끝에 드디어 나도 용기를 내어 comfort zone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67번의 이력서 제출에도 단 한 번도 오지 않던 인터뷰 기회가 그 해 9월, 선물처럼 찾아오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추천 덕분에 PwC, Deloitte, KPMG, EY 네 개의 회계법인을 포함해 총 여섯 개 회사와 인터뷰를 볼 수 있었고 두 개의 회계법인으로부터 최종 오퍼를 받아 석사 과정을 밟는 1년 동안은 마음 편하게 CPA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되는 누군가가 미국 취업을 꿈꾸고 있다면 나처럼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조금 더 빨리 용기를 내 사람들에게 다가가라고 꼭 얘기해주고 싶다. 나의 관심과 열정을 누가 먼저 알아봐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2022년 기준으로 미국에는 5000개 이상의 대학교가 있다고 한다. 잘 쓰인 이력서 한 장일지라도 그냥 발견당하기는 확률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일수록 네트워킹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최대한 많은 멘토들을 만나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