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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Sep 07. 2022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할 줄 아는 용기

당당함으로 빛이 나던 나의 매니저

넷플릭스에서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리즈를 보며 미국에서 1년차 때 만났던 매니저 소피아가 떠올랐다.


소피아는 프랑스 사람으로 KPMG 파리 오피스에서 뉴욕 오피스로 2년간 파견 근무를 나온 사람이었다. 처음 그녀의 프로젝트에 어싸인이 되었던 날, 고객사 건물에서 소피아를 처음 만났다. 우리 회사는 복장이 캐주얼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고객사에 갈 때는 비즈니스 캐주얼 정도로 차려입긴 했었는데, 짧은 민소매 원피스에 양팔은 타투로 가득했고 신발도 조리를 신고 있어서 내가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날 잘못 마중 나온 줄 알았다. 


자신을 소피라고 불러도 된다며 환하게 인사를 해준 소피아는 한껏 들뜬 어린아이처럼 내게 고객사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마침 그 고객사가 미국에서 한창 성장 궤도를 달리고 있던 티켓 플랫폼 스타트업이었어서 오피스가 정말 좋았는데, 소피아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파리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fancy 한 오피스라며 자기는 이런 회사라면 매년 자진해서 감사를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회사 탕비실에는 와인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고 맥주도 브루어리처럼 여러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흥분한 소피아는 와인부터 따라서 (오전 10시였다) 자리로 가져가며 나도 원할 때마다 마시면서 일해도 된다고 했다. 


음, 나 지금 새로운 나라에 온건가?


자유분방한 미국에서도 회계법인은 나름 보수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연수 때를 제외하고는 회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텐션이어서 그저 얼떨떨했다. 나는 프로젝트 2주 차에 투입된 거였기 때문에 노트북을 셋업 하자마자 바로 미팅에 따라갔다. 다 같이 회의실에 들어가 회의를 시작하는데 소피아가 갑자기 노트북 usb 포트에 꽂혀있던 전자담배를 빼더니 한 마디 할 때마다 한 모금씩 피우는 게 아닌가! 컬처쇼크가 이런 건가 싶었다. 그때는 소피아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며 완벽히 이해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 사람들이 이렇게 담배에 진심이었다니. 


아무튼 처음 며칠은 그렇게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며 보냈다.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마음속 어딘가에 알게 모르게 선을 그었다. 그런데 2주가, 3주가 지나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소피아의 통통 튀는 매력과 자신감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있던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영어를 곧잘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도 영어란 제2외국어에 불과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10이 있는데 뉘앙스까지 딱 맞는 단어나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7 정도만 입 밖으로 내거나 아예 말을 삼키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소피아는 "미안 얘들아, 너네도 알다시피 내 모국어는 불어잖아? 내가 지금 너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표현이 뜻대로 되려나 모르겠다. 혹시 내가 말하다 막혔을 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면 바로바로 알려줘!" 하고 사랑스러운 양해를 구하며 항상 끝까지 10을 다 표현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점심시간에 나누는 가벼운 대화 속에서도 "What is it called in English?"를 몇 번씩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팀원들은 그런 소피아의 노력이 가상해 마치 스피드 퀴즈를 할 때처럼 "A?" "B?" 하며 그녀가 설명하려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소피아는 항상 본인에게 인내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프로젝트 기간 동안 금요일마다 본인 집 루프탑으로 팀원들을 초대해 맥주를 한 잔씩 대접했다. 그러고는 또 본인만의 편안한 영어 스타일로 우리에게 프랑스에서 회계사로 살던 이야기를 마구마구 들려주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피아는 이 상황을 정확히 표현해 줄만한 단어 하나, 문장 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그러나 소통에 오해가 없도록 정확히 표현해내려 애썼다


1년이 지나고 다음 해에 같은 고객사에서 소피아를 다시 만났을 때, 너무나도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녀의 영어 실력은 이제 완벽에 가까웠고 직무상으론 원래부터 실력이 있었던지라 파견 나온 사람들한테는 잘 맡기지 않는 큼직큼직한 프로젝트들도 매니저로서 잘 이끌고 있었다. '난 어차피 영어라는 핸디캡이 있으니까 이 회사에서 크게 성장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한계를 지었던 내가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다시 본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소피아는 이제 뉴욕이 너무 좋아졌다며 파견 근무를 2년 더 연장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여전히 뉴욕에서, 또 한 번의 승진을 앞두고 있다. 


약점을 보완할 시간에 차라리 강점에 더 집중하라는 말도 맞다. 그러나 에밀리가 파리라는 도시에 빠르게 적응한 것처럼 소피아가 뉴욕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걸 보면서 나의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빠르게 오픈해 그걸 보완해내려는 용기도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 1년 차 때 그녀를 만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당하게 빛이 나던 소피아를 보면서 괜한 자존심으로 못 알아들을 때도 알아듣는 척을, 모르는 것도 아는 체를 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일을 배울 때는 그런 자세를 버리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덕분에 주니어 연차 때 이것저것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소피아에게 고맙다. 


뉴욕에 가서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꼭 말해줘야지-

Merci, So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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