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매는 언제나 엄마에게 못 미더운 존재였다. 나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역시나 엄마는 미래의 손주에게 둘째 딸이 부족한 엄마가 될 것임을 기정사실화했다. 감추려조차 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아기 낳는 게 그렇게 걱정돼?" 단호한 대답. “응, 난 네가 너무 못 미더워”.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엄마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불안한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완벽한 출산과 육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완벽한 배경지식 습득과 깔끔한 업무처리, 내가 누구보다 잘하는 바로 그것. 물려받은 육아 서적을 여러 번 읽었다. 누군가가 엑셀화한 출산준비리스트를 다운로드하여 하나씩 하나씩 준비가 끝날 때마다 줄을 그어나갔다. 출산 직전, 엄마가 집으로 나를 보러 오겠다 했다. 아기를 키울만한 능력이 되는지 최종평가를 고지받은 기분이었다. 만삭의 배를 이끌고 집을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게 쓸고 닦았다. 준비한 출산 준비물 들을 예쁘게 전시하고 엄마를 맞이했다. 최신 육아템들을 처음 보는 엄마에게 이건 뭐고 저건 뭐다 열심히 설명을 했다. 엄마가 어떠한 걱정을 제기할 때마다, 나는 그에 대해 이미 거친 충분한 고찰을, 그에 따른 가능한 다수의 시나리오와 그에 대한 계획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엄마는 제법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했을 때와 비슷한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는 나의 출산에 대해 자신의 출산만큼이나 몰입했다. 임신 초기, 나는 대부분의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 출산을 하면 입주 베이비시터를 모시는 게 좋겠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엄마는 이미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신 소식을 들은 엄마는 매일 같이 전화를 해 주변에서 먼저 손주를 본 지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하며 자신이 손주를 어디서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해 말했다. 잠깐, 나는 엄마한테 아이를 봐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엄마는 자기가 키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당시 우리 부부는 친정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자기가 어떻게 매일 10분씩 운전을 해서 왔다 갔다 하겠냐며, 우리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우리 부부와 새로 태어날 아이가 이사 올 만한 친정 아파트 단지의 매물들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집을 보러 다니지? 떠오른 의문들은 점차 희미해져 가면서 나는 어느새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엄마의 손주 육아 과몰입에 흡수되고 있었다. 엄마가 아니었더라도, 첫 임신과 첫 출산과 첫 육아는 불안으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부모님의 추천으로 잠시 모신 베이비시터는 알고 보니 70대의 노인이셨고, 지병으로 집안에서도 숨 차 하셨다. 드시는 약과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하였을 때, 심부전이었을 것이다. 아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으로의 긴 출퇴근길 위에서 그분의 건강 자체가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불안에 박차를 가했다. 요동치는 호르몬은 활활 타오르는 불안에 기름을 퍼부었다. 결국 복직을 준비할 때 즈음 나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친정집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기로 결정을 했다. 엄마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부동산에 가서 집을 봐주었고 너무 깨끗하고 괜찮은 집을 보았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직접 보러 가지도 않은 채 덜컥 전세 계약을 했다. 막상 계약한 집을 방문했을 때, 구축아파트의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붙인 붕 뜬 벽지, 공기를 잔뜩 머금은 시트지가 떨어져 나가고 있는 수납장들, 체리색 몰딩과 그 위에 중구난방으로 덧칠해진 페인트, 40년 동안 한 번도 고치치 않은 화장실의 타일들은 온몸으로 우울감을 내뿜고 있었다. 우리 신혼집의 인테리어도 나서서 진두지휘했던, 스스로가 고상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자부하는 엄마의 눈에 괜찮게 보였을 리 없는 이 집을, 엄마는 왜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걸까. 의문은 잠시 떠올랐다 이내 다시 흐릿해졌다.
그렇게 복직 후 나는 남편과 함께 출근하면서 아기를 친정집에 데려다주고, 퇴근하면서 아기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는 일상을 시작했다. 언제든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점이 안심되었다. 나는 그 편안함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복직을 할 당시 엄마는 어떻게 아기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냐는 말을 자주 했다. 아기가 행여나 젖을 간곡히 찾는다면 할머니 젖이라도 물려야겠다는 징그러울 정도로 남다른 포부를 보였다. 이럴 때 아기 엄마아빠들이 하는 말, 아기 사흘만 보시라고 해봐, 달라지실걸? 우리 엄마의 독기라면 다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흘은 커녕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복직 후 첫 출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보랏빛 낯빛으로 좀 쉬어야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가 힘없이 문을 닫았다. 맙소사,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베이비시터를 쓰자고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는 여전히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아기를 맡기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고용 형태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디선가 베이비시터가 아이에게 몰래 수면제를 먹여 재운 이야기를 듣고 오더니, 아이가 시터와 단 둘이 있게 해서는 안된다며 우리가 아이를 매일 친정집으로 데려다주고 시터님도 친정집으로 출퇴근하기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 종일이 아닌 반나절만 일하기를 바랐다. 내가 설정한 시터의 시급에 대한 불평이 이어졌다. 시터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 너 같은 호구는 없을 거라 부산을 떨었다. 왜 베이비시터가 가사일까지 전담하지 않는지, 엄마가 우리를 키우던 삼십 년 전의 ‘파출부 아줌마’들은 모든 일을 다하면서도 월급이 얼마였는데, 세상에 아이만 봐주는데 시급 만원이 넘는다니 말이 안 된다며. 조급해진 나는 평소의 과묵함을 벗어던지기로 결심하고 하루종일 엄마를 따라다니며 조잘조잘 설명을 했다. 엄마가 힘드니 시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세상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는 시터가 대부분임을, 그들의 ‘돌봄 노동’이 얼마나 저평가를 받고 있는 세상인지를 설파하며 여성연대를 통한 설득을, 현재의 최저시급이 팔천얼마인데 다른 일도 아니고 아기를 봐주는 사람을 최저시급에 고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경제적 접근을 시도했다. 말을 많이 하니 심지어 엄마와 삼십 년 만에 친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의 빈틈없는 논리는 공허하게 공중에서 흩어질 뿐, 엄마는 그 와중에 고학력의 경력자까지 원했다. 지원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나 연락이 오려나 기다리는 일주일의 동안 엄마는 아이를 보느라 점점 얼굴이 파래졌고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 연락도 없은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결국 시급을 시세 정도로 올리고 풀타임으로 조정했고 엄마를 대동해 열 번이 넘는 인터뷰를 하고서 좋은 시터님을 고용할 수 있었다. 엄마가 우리 집을 거쳐간 시터님들에게도 깐깐하게 굴었냐라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엄마는 매일 시터님의 점심 식사를 푸짐하게 직접 차려주었고 시터님들이 들려주는 인생 풍파 스토리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시터님이 퇴근하시고 나면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시터님도 쉬는데 왜 그 많은 월급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엄마에게 시터님에게 반말을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면, 너는 너무 예민하다 했다. 친구들은 복직 전에 며칠만 고생해서 좋은 시터님들을 척척 구하던데, 왜 나는 시터님을 구하고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그것 하나가 왜 이리 답답하고 힘든지, 아이 하나에 시터님에 친정엄마까지 있는 복에 겨운 상황에 왜 늘 계란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지, 미련하고 예민한 나 자신이 미웠다.
복직 후 나는 주 1-2회 당직을 섰다. 당직을 서는 날에는 남편이 주로 아이를 데리고 잤지만 남편조차 병원에 콜을 받고 나갈 때는 엄마가 아이를 봐주었다. 병원에서 갑작스레 추가 인력이 필요할 때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일 조차도 온전히 집중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엄마에게도, 아기에게도, 남편에게도, 직장에도, 미안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 같았다. 이상했다. 분명히 나는 무엇이든 잘 해내는 재능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기를 쓰고 노력하고 있는데. 나의 분신을 하나 만들어서 하나는 집에 하나는 직장에 박아두는 해결책이 아닌 이상,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 같았다. 나 자신의 어느 부분 하나 편안치 못하니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 같았다. 나의 모자람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남편과의 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는 아기를 낳고 엄마의 심기가 뒤틀릴까 온 집중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면, 엄마는 이모의 며느리들이 밥을 다 먹고 나서 먼저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며 나와 언니에게 심한 흉을 보며 너희는 시집가면 그러지 말라 강조했다. 남편에게 ‘밥 먹고 나서 설거지 안 하면 우리 엄마 뒤에서 흉 봐’라고 했다. 남편은 설거지를 하려 해도 장모님이 뜯어 말리시는데, 왜 내가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지 황당해했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엄마는 사위가 설거지를 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그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이모의 며느리들의 흉을 보았지, 역시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이모의 사위들의 흉은 보지 않았다는 것을. 하다 못해 이제는 엄마를 핑계로 남편까지 가스라이팅 시키고 있는 나라니, 혹시 내가 진짜 미친 건가?
그러다 직장에서의 인사가 잘 풀리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늘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다. 이직과 출산 등으로 포기해 가던 중에 계기가 될만한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정말 실천할 때였다. 남편의 동의 하에 캐나다의 어느 연구소에 연락을 했고 와서 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밀려서 외국으로 좌천되는구나.” 엄마가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딸이 욕심이 많아서 자네까지 고생시켜 미안하네.” 나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발끈했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그렇게 예민해서 나중에 OO이에게 악영향일 것이다.” 아, 이렇게 아이를 위해 기를 쓰고 살아도, 결국에는 나쁜 엄마가 될 운명이라니. 이기적인 결정을 저질러놓고도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랐다니. 애를 쓰면 쓸수록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는 이곳은, 혹시 염라대왕의 나태지옥인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내가 독이 될 운명이라면, 삶을 끝내고 도망가버리는게 나을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사실은 그동안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윤회의 소용돌이인 것인가. 그럼 끝내 봤자 도망도 못 가고 계속 반복되는 거잖아. 나는 정말로 미친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