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경 May 09. 2024

극강(極強)의 사죄, 도게자

‘한자와 나오키’

최고 시청률 44.1%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2013년 TBS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 “당하면 되갚아준다. 배로 갚는다! (やられたらやり返す! 倍返しだ!)”는 자극적인 부제가 붙은 이케이도 쥰(池井戸潤)의 ‘한자와 나오키’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이름입니다.



이 드라마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버블 붕괴 이후 힘없는 서민들을 고통에 빠트린 거대 금융인 은행의 부정부패가 폭로되었다는 점일 겁니다. 한자와는 은행이 ‘날씨가 좋으면 우산을 내밀고 비가 쏟아지면 우산을 빼앗는, 인정사정도,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으로, ‘일본의 장인은 은행을 믿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은행에 의해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다’라고까지 강변합니다. 1990년대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지나친 부실채권, 과잉투자 등으로 노무라증권 등 대형 증권사와 은행의 파산 등 금융시장 시스템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서민들의 삶을 팍팍해진 겁니다.



전 일본을 강타한 ‘한자와 나오키’는 5억엔을 대출해 준 회사의 도산이라는 대출 실책을 부하인 융자 과장 한자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지점장 아사노와 한자와의 싸움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속 “부하의 공은 상사에게, 상사의 실패는 부하에게”는 일본의 샐러리맨 사회를 지배하는 연공서열, 상명하복의 문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사입니다. 은행의 ‘꼬리 자르기’로 꼼짝없이 좌천 위기에 몰린 한자와는 이 대출 사고가 처음부터 의도된 계획 도산임을 알고 은닉한 재산을 회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온갖 치졸한 방법으로 괴롭힌 상사에게 한자와는 “내가 이기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라며 몸소 상명하복을 시연까지 합니다. 유착 증거가 발각된 아사노 지점장이 드디어 ‘도게자(土下座)’를 하는 장면은 최고의 시청률로 보답합니다. 



무릎을 꿇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려 잘못을 비는 ‘도게자(土下座)’는 보는 사람조차도 굴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궁극의 사죄법입니다. 근대 이전에 신하가 왕에게 잘못을 비는 석고대죄 포즈인거죠.




도게자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등장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풍습으로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왕이나 양반 앞에서 엎드려 잘못을 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근대 이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라졌지만, 왕이 존재하는 일본에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겁니다. 


한자와는 상하 관계가 강한 일본 기업문화에서 계파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상사의 잘못을 거침없이 직언하는 좀 비현실적인 인물입니다. 드라마가 굳이 팍팍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필요는 없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영화 같다’, ‘드라마 같다’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식 석상에서 고위관료가 국민에게 ‘도게자(土下座)’로 처음 사과한 것은 아마도 1977년의 미나마타병일겁니다. 당시 환경부 장관이었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는 미나마타(水俣)의 질소공장의 폐수 방뇨로 주민들이 수은중독에 걸려 다양한 신경학적 증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도게자’로 사과합니다. 


1996년에도 일본 혈우병 환자가 사용하던 비가열 혈액제가 에이즈를 감염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생성 관료와 녹십자가 결탁해 내버려 두어 1800명의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에 걸린 사건이 발생하여 고위공직자가 ‘도게자’로 사과합니다. 






거꾸로 국민이 ‘도게자’로 참회하는 모습을 연출할 때도 있었습니다. 라디오로 패전을 선언하는 일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본의 국민은 울면서 ‘도게자’를 했는데 이 모습은 오래오래 회자되었습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싸운 성스러운 전쟁이 자산들이 잘 싸우지 못해 일왕이 굴욕을 겪게 된 것에 대한 머리숙여 사죄드리는 거죠. 일본 국민들이 일왕에게 패전에 대한 원망을 할 줄 알았던 미국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을 겁니다. 히로시마에서 그렇게 많은 무고한 희생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일왕이 국민들에게 그야말로 도게자로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저 남일처럼 마음만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걸 납득하는 국민 역시 저로써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게자’는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고 궁극으로 사과할 때 사용하는 건데 최근에는 매장에서 사소한 잘못을 이유로 상사에게 ‘도게자’를 강요받은 직장인, 지하철역에서 승차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객을 멈춰 세웠다가 ‘도게자’를 강요받은 역 직원 등 별것도 아닌 것에 '도게자'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면서 논란이 번지고 있습니다. 도게자를 요구하는 것은 강요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갑질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 잘못을 빌 때도 하기도, 꿈쩍도 하지 않을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는 형태가 도게자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들어줄 거냐 뭐 그런 거죠. 예를 들면 결혼을 반대하는 집안을 찾아가 ‘도게자’로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같은 상황인 거죠. 이처럼 도게자는 정말 수습하지 못할 사고를 쳤거나 매우 곤란한 부탁을 할 때 취하는 행동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도게자’는 전혀 사과나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파괴력이 있지만 잘못하면 반감을 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도게자’는 가능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은 최종 무기라고도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일본인들은 사소한 것에도 사과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태평양전쟁 책임을 묻는 피해자들이 그렇게 사과를 요구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건 왜일까요? 정말 난 시켜서 한 일이지 내 의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사과하지 않는 걸까요? 아님 이것도 일왕이 시키지 않아서 혹은 자신들이 사과하면 일왕을 욕되게 한다고 생각해서 안하는 걸까요? 어쨋든 '도게자'라는 건 받는 것도 하는 것도 그리 탐탁하지 사과법인 것 같습니다. .



작가의 이전글 분신사바와 코쿠리상, 그리고 테이블 터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