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사람들이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은 공식 석상에서가 아니라면 타인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직접 하는 걸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상대방 때문에 좀 불편한 일이 생겨도 아주 격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직접 불평을 말하지 않습니다. 난 지금 네가 하는 언행이 불편하다, 그런 거 하기 싫다는 걸 돌려서 표현합니다.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예의 있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거죠. 그러려면 사회적으로 약속된 말과 행동을 해야겠죠. 그런데 상대방이 약속된 말이나 제스처를 못 알아들으면 자신의 행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죠. 그러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상대방을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오해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병문안할 때에는 이런 말, 남의 집에 갈 때는 이런 말, 인사치레는 이런 말, 편지의 서두에 써야 하는 말 등 상황에 맞는 정해진 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걸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말들을 해야 하는 거라고 어린 시절부터 배웁니다. 어쩌면 그런 말들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순간 그 말에 마음이 담기기 시작한다고 믿는 거죠. 그래서 일본의 모든 학습, 그것이 공부든 예술이든, 요리든 뭐든 구몬학습지를 하듯 정해진 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몸이 반응하게 하는 겁니다.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순간부터 다시 거기서 나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공기를 읽을 것이 요구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겁니다. 보통 공기를 읽는다는 것은 눈치를 본다는 말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의미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공기를 읽는다는 건 전반적인 상황을 읽어내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이해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린 가끔 우리 주변에서 공기를 제대로 읽지 못해 반감을 사는 경우를 봅니다. 왜 저러고 있지? 인제 그만두라고 하는 시그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그런 경우 말이죠.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눈치 없는 사람들은 업무나 인간관계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아니 그래서 더욱 불편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나는 눈짓, 몸짓으로 너에게 엄청나게 친절하게 설명했어. 그런데 왜 넌 나의 친절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지? 역시 넌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음울한 괴롭힘이 시작되는 겁니다. 난 내 할 도리를 다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네가 나빠서이거나 나(우리)를 무시한 것이니 네가 잘 알아들을 때까지 네가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벌이 아닌 알려주는 과정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이형기 시인의 낙화가 생각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은 그 긴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피워낸 꽃이 겨우 봄 한 철 분분히 지고 마는 것이, 아무리 서러워도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자연을 진리이며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하롱하롱’ 꽃답게 죽어야 할 때 붙어 있는 꽃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눈치 없는 꽃입니다. 이미 색도 바라고 너덜너덜해졌다는 걸 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못 느끼고 “나는 아직 아름다운 꽃이니 이 자리에 있어야지”라며 붙어 있는 눈치 없는 꽃들에게 할 수 있는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