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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ul 02. 2024

(일기) 아름다운 타인의 인생, 영화의 공간

2017.07.02 너는 20%의 일원이 되어라

프롬나드의 호박색 조명과 따듯하고 매콤한 샹그리아와 통유리 창밖으로 펄펄 내리던 함박눈과 바 옆으로 내린 스크린에 비치던 흑백 고전영화를 생각한다. 영혼이 그토록 황폐하던 이십대 한복판에 언제 가도 아는 얼굴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따듯한 공간이 존재해서 다행이었다. 원한다면 늘 첫차시간까지, 홀로 혹은 교수님과 둘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밤을 샐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교수님이 내 인생에 계셔서 다행이었다.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서 울면서 술 한 잔만 내어달라고 했던 그 날... 교수님이 따듯하게 데운 와인을 한 잔 주시던 그 날. 그 후로도 교수님은 계속 연락을 주셔서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다. 변변치 못한 곳일지언정 어려움에 처한 제자 하나 데려다 줄 수 있는 직장 하나 없겠느냐며 힘들면 꼭 말해달라던 분...


나는 영상물에 취미도 재능도 없는 사람인데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건 교수님 덕분이었다. 교수님의 공부와 관점과 감각은 나 같은 사람도 사진과 영화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지금 영상물을 보며 관찰할 수 있는 요만큼의 틀이나 감각은 모두 교수님이 주신 것이다. 교수님이 하는 불어가 멋있었다. 교수님이 내리는 에스프레소는 먹어본 적 없지만, 교수님의 액팅은 좋아했다. 그런 공간은 앞으로 없겠지. 있더라도 이십대의 그런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인아, 십 년 후면 너는 뭐라도 되어 있을 것이다 하시던 분. 종종 커피값 안 받으시던 분. 나이와 성별과 국적으로 사람을 차별은커녕 구분해 대하신 적도 없으시던 분. 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개인주의가 뭔지 교수님을 통해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체주의에 민족주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내게서 묵은 때를 벗겨내주신 분도 교수님이셨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던 날에도 찾아가 술을 마셨다. 박정희에 맞서다 프랑스로가셨는데 돌아와서 다시 이명박에 박근혜라니- 씁쓸하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그래도, 정인아, 20%만 움직이면 세상은 다시 바뀐다. 세상이 바뀌고 나면 모두가 걸어나와서 자신들이 손을 보탰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사람들도 그렇게 주장하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변화가 자부심이 되도록 너는 20%의 일원이 되어라 하셨다. 여러모로 영화 하시는 분이시니 그런 풍모를 갖추고 그런 삶을 사실 수 있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그립다. 역시 황무지에서 끝끝내 회복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삶의 고비고비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타인의 인생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동경하게 되고 흉내내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지는 유혹적인 인생들. 유혹적인데 내게 따듯한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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