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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 Jul 06. 2022

수챗구멍 심리학

중년부부의 말없는 대화법

며칠 전부터 안방 화장실 샤워부스 바닥에 물이 빠지는 속도가 늦어졌다. 샴푸를 하고 머리를 헹구는 동안에 바닥에 물이 점점 고인다. 물 빠질 시간을 벌기 위해 바로 샤워를 하지 않고 세수부터 한다. 얼굴을 거품으로 문지르는 동안 물이 빠지면 그때 얼굴을 헹군다. 



그렇게 한차례 바닥의 물을 흘려 보낸 다음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는 동안 물이 고이겠지만 마무리하고 나오면 그 후에 물이 서서히 빠진다. 그런 식으로 얼마 동안 지낼 수 있다.

 


막힘의 원인은 주로 머리카락과 물때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것들이다. 수챗구멍이 막히면 남편이 뚫는다.

참! 내 남편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면, 남편은 사람이 좋다. 다만 남편으로서 많이 자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바깥일과 집 안의 일에 대한 경계를 긋는 사람이다. 그래서 집 안의 일을 한다는 건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직장에 나갈때에도 '도와주는'건 많지 않았지만 수챗구멍이 막히면 곧잘 뚫었다.

처음엔 머리카락이 많이 나왔다고 생색을 겸한 잔소리를 를 했지만 언제인가부터는 조용히 그 일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안 해 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좀 개겨보자는 마음이 들었는데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남편이 잘 안하던 설거지와 청소 분리수거를 어쩌다가 한다면 그가 아주 기분 좋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듯이, 잘 해주던 일을 안 한다는 것은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는 방증이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일이 막힌 수챗구멍 뚫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나는 <수챗구멍 심리학>이라고 명명한다.



수챗구멍의 가장 큰 원인이 머리카락이고 그 머리카락은 주로 나에게서 빠져나간 것일 테니, 남편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그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남편은 사람이 좋다. 무엇을 미루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챗구멍을 뚫지 않고 미루는 것의 원인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  

남편은 수챗구멍을 뚫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조금 개기긴 했지만 그냥 내가 뚫었다. 

 


지금쯤 내가 뚫어놓은 수챗구멍을 남편도 확인했을 것이다.  수챗구멍 뚫기 거부 및 말없는 수챗구멍 뚫기 지시를 아내가 해 놓았다는 것을 안 남편의 심리는 이렇게 작동한다.

하나. 뜻대로 되어 만족스럽다.

둘.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셋.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남편의 이런 심리가 쪼잔하고 치사하게 느껴졌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내가 남편 마음을 속 시원히 뚫어 줄 순 없지만, 그까짓 수챗구멍이 머시라꼬. 

<수챗구멍 심리학>은 이렇게 간단하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남편의 심리와 그것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 살아있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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