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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Dec 01. 2022

내 피, 땀, 눈물 그리고 뼈와 살을 모두 가져가

<본즈 앤 올(Bones And All)>, 2022


청춘 기억 조작단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티모시 샬라메 배우의 조합은 이 영화를 단숨에 주목하게 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소년의 첫사랑을 시각으로도 그 맛이 느껴질 만큼 달콤하고 씁쓸한 색감으로 표현했던 이 둘의 만남은 관객들에게 기대치를 모으기에 벌써부터 충분했다.



성장, 로드무비, 로맨스 그런데 이제 핏빛을 곁들인...

영화가 갖는 장르적 특성은 이질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따라 떠나는 로드무비를 통한 성장 장르와, 그 속에서 만나는 첫사랑과의 하이틴 로맨스... 여기까지는 기존에 봐왔던 하이틴 성장, 로맨스물을 연상케 했으나 차별화를 둔 것은 바로 호러를 더했다는 점이다.


성장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에 대한 본질과 근원을 찾아가는 것인데, 그 정체성에 대한 추구라는 것은 남들과 내가 같지 않고 다른 점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그동안 주로 다루어졌던 이질적인 정체성에 대한 것은 인종적인 문제,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본인 역시 성소수자이므로 이 부분을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듯하다.), 본인의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 문제, 자신이 추구하는 꿈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이런 이질적인 정체성에 대한 내용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는 용납이 가능한 것이고 더러는 공감을 얻을 만한 내용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정체성과 본능이 인간사회에서 원초적으로 금기시되는 '식인'행위라면 어떨까. 이러한 영화상의 설정은 주인공이 갖는 이질적 정체성에 대해 한 치의 공감과 용인의 여지도 주지 않음으로써 극단의 환경으로 내몰아 세상에 홀로 주인공의 처지를 고립시킨다.




카니발리즘이 갖는 의미

'식인'행위가 금기시 이유를 원초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동족을 포식하지 않는 것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많은 생명체들이 그러하다. 가장 객관적으로 현상을 판단하자면 실익이 없어서일 것이다.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농업화 된 협력사회에서  노동력을 보존하려는 시도에 의해 산 채로 서로 먹는 것이 금기시되고, 또 시체를 먹는 식인 행위가 여러 질병에 감염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꺼려졌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인, 동족 포식을 하는 경우가 기는 있다.

반대로 명확하게 이점이 있을 때, 즉, 사마귀의 경우처럼 번식을 하고 수컷을 잡아먹는 경우는 영양학적 측면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극한 상황에서의 생이 필요한 경우 부득이하게 동족을 포식해야 할 때가 예로 될 수 있을 것이고

인간들에게는 특수하게 이에 좀 더 상징적인 의미를 붙여 주술적 의미, 상대의 능력치를 자신이 흡수한다는 의미 등로 생존에 직결되는 이점이 없어도 행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영화에서 식인행위가 나타내는 의미는 앞서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성장영화라는 관점에서 달리 생각해보았다.




육욕의 두 가지 형태-식욕, 성욕

인간이 육체에 대해 갖는 두 가지 원초적 형태의 욕구가 있다면 식욕과 성욕이 될 것이다. 필자가 대학생 때 생물학 교양 수업을 들은 바 있는데, 논문을 번역하면서 봤던 내용을 인용하자면 생명체는 자기 종족의 보존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


하나는 자기 본체의 항상성 유지,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닮은 2세를 낳는 번식.

인간의 두 가지 욕구 중 식욕은 전자에 해당할 것이며, 성욕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식인행위는 자기 자신의 욕구의 충족이 우선되는 식욕의 단계를 뜻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 우선하기 때문에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상대를 해하게 되고, 상처 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공 매런(테일러 러셀 분)은 그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에서는 '어쩌면 사랑이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욕(사랑)으로 나아가는 단계를 의미했다. 매런이 비슷한 정체성의 리(티모시 샬라메 분)를 만나 사랑을 겪고, 상대를 탐하게 되면서 육체에 대한 욕구가 식욕으로서가 아닌 성욕으로서 발현된다. 성욕, 즉, 사랑의 단계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육체를 우선시하는 게 아니라, '양방향'이 되는 것 의미했다.


매런은 리와 마주하기 전에, 일찌감치 자신을 알아본 동족인 설리번(마크 라이런스 분)을 이미 만났고, 함께 하자는 권유를 들었다. 리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서, 식욕의 단계에 여전히 머무른 채 3인칭로 자기 자신을 칭하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고립되어 있었다.


매런은 그런 설리번과 함께 하기는 거부하면서, 리와는 쉽게 교감하고 성애를 나눈다.

매런의 식욕이 성욕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양방향'적 욕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리는 되었고, 설리는 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녀인 매런에게 설리는 나이 든 육체에 갇힌 정신은 한참 어린, 소름 돋는 늙은이에 불과했더라면, 리는... 티모시 샬라메다.

한 문장으로 정할 수 있을 정도다. 티모시 샬라메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최상의 폼을 유지하고 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인물로 만다고 하면 그가 아닐까. (턱에 피가 묻고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게 티모시 샬라메라면 기꺼이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매런과 리는 각자의 정체성에 갇힌 서로를 구해준다. 키스 장면이 자주 등장해서 관능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먹어버리는 것이 아닌,  상대를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단계에 이른 키스의 장면들은 이제 더는 서로를 해하는 결과를 낳는 욕구에서,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욕구로 성장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자기희생으로발현되는 사랑의 완성

말부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위의 제목로 정리했다.

사랑의 기승전결,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가, 상대와 교감하고, 궁극으로는 '자신의 뼈와 살을 모두(Bones and All)' 내놓을 수 있을 정도희생으로써 상대가 나보다 우선시되는 사랑의 완성적 단계 가 성장통.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성장소설 대표적 작품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나오듯, 성장의 과정은 결국 알이라는 자기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을 수반한다.


사랑의 본질도 비슷한 게 아닐까. 왕국 같던 나만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상대에게 모조리 내어주는 일로서 완성되는 것.

깨고 나오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 자신의 세계만을 지키려던 리는 겉늙은 채 홀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않은 두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단계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본질은 완성이 아니라 파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위해 기꺼이 내 세상을 무너뜨리는 일, 것을 나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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