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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Mar 03. 2024

새로운 생과 시작을 위해서 파헤쳐야만 하는 죽음과 끝

<파묘>,  2024

삼일절에 우연히 감상하게 된 영화였는데, 마침 시기가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적인 깊이 없이, 그저 흥행하는 영화이면서, 주연배우들이 쟁쟁한 탓에 보고 싶었으므로 영화를 보면서 필자가 흥미 있어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보니 더욱이 몰입해서 감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주에 관심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사주팔자 명식이 그렇다 하더라.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토'의 기운이 5개나 있어서 화토중심의 순환구조를 이루는 데다가, 이 '토'라는 오행의 속성은 민간신앙을 좋아한단다.

그리고 이 오행의 의미는 중용이기도 하고, 변하지 않고 싶어 하는 고집이기도 하며, 다른 오행을 저장하는 창고인 고지(庫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묘지(墓地)가 되기도 .



토(土)가 갖는 의미

사주나 명리학 등 동양철학에서는 목, 화, 토, 금, 수라는 오행의 순환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섭리를 말한다. 목이라는 것은 생명의 발아이자 나라는 존재의 발원이다. 그 후 화라는 꽃피우는 청년기의 열정을 지나, 토라는 중용의 단계, 그리고 금이라는 실체적인 결실의 단계, 마지막 수라는 깨달음과 모든 것을 흐르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시기를 순환하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토'라는 것은 이 오행이라는 순환 속 중간 단계에 있으면서도 가장 색채 없는 모습을 나타낸다. 토라는 기운은 다른 기운의 완화제이면서 동시에 촉진제가 되기도 하는 중간적 요소이다.

땅이라는 것은 생명의 발아를 도와주는 근원이 되면서, 다시 그 육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묘지가 됨으로,

사주에서 가장 해석하기 난해한 성질을 가진 것이 토로 알고 있어,

필자는 아무리 스스로 사주를 공부하여도 제 명식을 이해하는 것이 늘 어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완충적' 역할을 놓고 보았을 때, 무당도 또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 극 중 김고은이 소화했던 무당의 역할이 그러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사주의 음양오행이라는 것 또한 생명의 순환을 말한다.

목이라는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것에서 꽃피는 화의 기운을 넘어 생산적인 토의 기운 그리고 결실이라는 금의 과정, 마지막으로 거두어들이는 수의 기운까지 순환하는 것.

그런 순환으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것을 선조들은 삶의 지혜로 삼았다.

사주를 조금 공부해 보면 '묘'라는 것은 토 그 자체이며, 토는 생명이 모두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고

한편으로는 그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임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파묘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고,

생명의 가장 첫 단계를 넘은 아기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영혼 때문에 후대의 가장 어린 생명이 고통을 받는 것은

분명 순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순환의 섭리를 정상화하고자, 극 중 김고은은 '파묘'의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식사는 생명유지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행위

영화에서는 죽은 영혼도 그렇고, 산 사람들도 그렇고 먹는 것에 집착을 하고 먹는 장면들이 유독 많이 나온다.

나는 다른 영화를 리뷰하면서도 '먹는다'는 식욕 행위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부인사이기도 한 '밥 먹었냐.'는 말은 생존하는 데에 문제가 없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인 제사를 놓고만 봐도, '제사상'을 차리며 귀신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가 필수적이다. 영화에서도 귀신들이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며 식탐을 부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른 나라의 혼령/귀신들을 묘사할 때 식욕을 부린다든가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찾아보기 드물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줄곧 먹는 장면이 유독 자주 보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라든지, '곡성'에서 묘사된 느낌이 비슷했는데, 죽은 혼령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탐하여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바로 식탐이었다.

유독 '식사'라는 행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꽤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몸소 이해했다.


친일파였던 그 조부 귀신이, 음식부터 쩝쩝거리며 먹는 것, 그리고 은어를 탐하여 먹었던 일본 사무라이/장군 귀신, 장례식장이면 무릇 육개장을 먹기에, 극 중 유해진이 식사를 하는 장면 및 후에 최민식이 입원을 해서도 주변에서 찾아와 굳이 병실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 등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을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 장치로 '식사'를 꼽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다른 사람의 식사를 챙김으로써 정서적 유대관계까지도 내포하는 다소 복합적인 개념의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친절한 설명

평소 좋아하는 영화 유튜버가 이 영화가 '항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썸네일을 봤던 터라서,

그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하긴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비행기 안에서 간단히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부터 예고를 날린 셈이었다.


기순애=키츠네?

여우와 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반도 지형이 호랑이라는 이야기(그때 철없는 초등학생 짝꿍 남자애가 '토끼' 같은데요?라고 반문했던 게 충격이어서 기억에 깊이 남았다.)를 어릴 때 주입식 교육으로 들어온 나는

단박에 여우가 그렇다면 일본을 말하는 거겠구나 했다.


시대적 배경을 놓고 봤을 때, 일제강점기를 말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9척인지 10척인지 넘는 진격의 거인 '사무라이'귀신이 나타면서 500년 전이라는 빌드업을 내건 이 숙명이라는 게, 1500년대인 왜란까지도 거슬러 가는 건가 싶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해 그리 후한 평가를 내놓지는 않는다. 그야,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범'인데, 유교적 대의와 명분, 문화를 전파해 준 은혜를 모르고 감히 범을 공격할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호랑이 없는 소굴에 여우가 호랑이 노릇을 한다는 속담도 그렇거니와, 일본의 미신에서는 호랑이의 존재보다도 여우가 자주 등장을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실제 영토의 식생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란 말이 있을 만큼, 호랑이라는 최상위 포식자가 영토에 존재했지만, 일본의 전통신앙에서는 여우이야기는 들었던 반면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는데, 극 중 최민식이 마지막에 해설을 친히 해줌으로써 모든 의문의 여지는 풀리는 셈이었다.


그리고 일본=금속=무기와 총칼=침략세력, 그에 맞선 나무=토속적=항일세력의 대비되는 느낌은

우리 영토의 자연적인 부분을 파괴한 것을 상징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런 부분에 대한 상징은 넓게는 영화 <곡성>과도 얼추 느낌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상징에 대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무엇보다 혼령으로/정령으로 나타나던 그 일본무사귀신도 형체를 알 수 없게 보였다면

더 공포감이 극대화되었을 테고 주제에 대한 의식이 통일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전국시대? 왜란? 까지 거슬러 간 일본 무사복장을 한 모습의 귀신이 너무 대놓고 드러났을 땐 조금은 뭐랄까, 메시지가 노골적이라서 좀 아쉬웠다.


극 중 최민식이 다른 배우들에게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호소를 한 장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주제의식이 가장 극대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한 유해진을 기독교인으로 설정한 것은 아무래도, 무속신앙으로 폄하되는 토속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대치되는 일반적인 현실 상황을 구국/호국 신앙이라는 한 주제로 모두를 아우르는 설정이 아닐까 싶었다.



힙한 케이 콘텐츠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요소를 다 때려 박고도 힙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가히 매력적이다.

극 중 김고은이 굿을 할 때 전통복장을 차려입고 컨버스화 신발끈을 묶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극 중 주요 4인방의 훌륭한 연기는 극을 매우 능숙하게 이끌어가면서, 옛것에 대한 거부감 없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느낌도 없이, '멋지다'는 느낌을 주는 훌륭한 한국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안 그래도 부상하고 있는 한국문화에 대한 위력에 보탬을 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을 또 한 번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매력을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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