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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즌정 Nov 21. 2022

시대의 아이콘으로 사는 법

<스펜서(SPENCER)>, 2022


배우의 재능

  내가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윈저 왕가에 대한 환상 때문이 아니었고,

전적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 때문이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그녀의 데뷔 초부터 좋아했다.


데뷔 초반 때 어떤 시상식에서, 빨간 드레스 밑에 검은 컨버스 하이를 신고 등장해서

워스트드레서로 지목받았을 때부터 그녀의 패기와 반항심이 제법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그 누구보다 많은 비중으로 세밀한 심리 묘사에 무너지는 연기부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연기까지 스크린을 채우는 동안 이 배우가 표현하는 다이애나에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영국 악센트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화려한 삶의 이면에서

나름대로는 좋은 집안 출신이긴 하지만 (아무리 영국 신분제가 폐지되었어도 왕실 결혼에는 어느 정도 급이 필요한 법), 평범한 삶을 누리다가 일약에 신데렐라가 되었던 다이애나는 '결혼' 하나로 온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또 그 결혼생활을 불안하게 했던 남편 찰스 왕세자비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내연관계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심지어 이혼 후 평범히 살아가던 그녀가 갑작스레 맞이한 죽음까지도 영국 왕실의 음모론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왕실과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I'm the magnet for madness. Other people's madness.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자석인가 봐요.

영화의 시점은 91년 크리스마스로 왕실 가족이 모인 한 이벤트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가족의 크리스마스가 아닌, 식사 코스와 옷 입는 순서마저 틀에 맞춰

모든 게 정해진 수순대로 정해지는 일련의 행사 속에서 변해가는 다이애나의 내면 심가 주된 묘사이다.


이 영화가 접근하는 방식은 관객의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그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게 한다.


그녀가 찰스 왕세자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됐는가, 또 어떤 일련의 불륜 사건이 그녀를 정신 쇠약으로 몰고 갔나, 누가 그녀를 죽게 했나 등의 값싼 가십거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들판에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낡은 자신의 유물과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텅 빈 허수아비 같이 ,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재미'로 자신을 쏘아대는 사냥꾼들에게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꿩 같은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돌아보게 된다.


You know at school you do tenses?
There's the past. the present, future.
Well here, there is only one tense.
There is no future.

학교에서 시제를 배우지?
과거가 있으면, 현재, 미래가 있지.
그런데 여기는 딱 한 가지 시제밖에 없어.
미래가 없어.




세련된 페미니즘의 표현

 샐리 호킨스는 정말 강렬한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대로 믿게 만드는 강력한 설득력을 표정에서부터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와의 다소 모호한 관계 설정이 동성애적인 이슈를 조금은 내포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었을 때에는 영화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 지점을 영화는 잘 이해하는 듯 보였다.

Fight them, You are your own weapon.
그들과 맞서 싸우세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의 무기예요.

 그리고 다이애나가 자유를 얻기의 과정까지 조력자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준다.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상 속 매기의 쪽지에 쓰인 말처럼, 다이애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단 매기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일단 내가 그랬고...


 그리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그녀의 스타일이었다. 생전 패션 스타일로 화제가 되었던 만큼,

영화 속 다이애나로 분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든 스타일이 좋았다.

첼시 부츠부터 나이키 운동화까지, 플래이드 재킷부터 화려한 드레스까지... 다채로운 색채가 그녀의 캐릭터에 더욱 생기를 부여해주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란 특정 인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더라도 충분히 재밌고 영감을 주는 영화였다.

가련한 그녀가 왕실과 대중의 눈에 갇혀 미쳐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삶을 향한 자유를 깨달아 갈 때까지의 모습은 조금은 우리네 인생과도 닮아 있다고 느꼈다.


지나치게 유명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리 나 자신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갑자기 일상에 갇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고, 괜찮은 척 마음을 다 잡아야 했을 때가.


내가 그랬다.

평범한, 내가 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갑자기 낯설고 숨 막히고, 나를 압도해오는 느낌에 쉽게 지쳤던 때에 마침 이 영화를 봤다.


https://youtu.be/ugUVRDTdoLc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특히 이 운전 장면을 보고 약간의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고 다시 행복해졌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가장 좋아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일을 찾는 노력을 절대 멈추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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