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만난 아버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버지를 세 번 만났거나 보았거나 한 것 같다.
2년 전 언니들과 만나 올림픽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큰언니가 뜬금없이 " 내가 그때 왜 철이네를 서울로 데려와 도와줬는지 아니?" 한다.
"왜?"
그렇잖아도 아주 오래전 큰 언니가 부산에 있던 철이네 가족을 서울로 불러들여 언니 집 한쪽까지 내어주고 , 형부 회사에 취직시키고, 함께 살았었다.
집안에 아들이 잘되어야 한다며 자주 철이네를 챙기는 것을 보며 서운하고 약간 역정이 들기도 했다. 친동생인 막내 나보다 철이네를 더 살뜰히 챙기는 이유가 뭘까 늘 생각이 들었던 터였다.
"옛날 아버지가 결혼한 나를 찾아왔었어. 무슨 이야긴지 하다가 아버지가 죽으면 철이는 장녀인 내가 잘 거두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
(이게 말이니 똥이니?)
울컥 가슴이 메었다. 울분에 내 목소리가 거칠게 격앙되었다.
"언니, 아버지가 사람이야? 딸 넷 모두 조강지처 엄마에게 내맡기고 첩질 하며 돌아다니다가 그 여자 만나서 살림 차리고 월급 모두 그 집에 다 주고, 엄마는? 우리들은? 외갓집에서 얻어먹고 살거나 말거나 팽개쳐버린 양반이, 정말 뻔뻔스럽네. 언니들 결혼할 때 단돈 일원 한 푼 안 도와준 아버지란 사람이 시집간 딸 만나서 한다는 말이, 뭐, 자기 죽으면 자기 아들 거두어 달라고? 아니, 아이고 답답하네, 그때 왜 좀 뭐라 하지 왜 네, 네 했어, 언니?....... 흑......"
오래 묵혔던 말은 험했다. 가슴이 메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아, 그렇구나.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렇구나. 그렇지? 내가 바보 같아."
큰언니는 80이 넘었다. 언니도 그런 남성문화와 가부장적 요구에 익숙했으리라.
말이 나온 김에 더 쏟았다.
"언니 말 들으니...... 난 두 번 버림받은 느낌이야. 철이만 걱정되고 동갑인 난 걱정 안 됐대? 왜 아버지는 나를 유복자처럼, 사생아처럼 아비 없는 아이로 만들고 얼굴 한번 보여줬나? 아버지 일본으로 미국으로 돌아다닐 때 선물이라고 연필 한 자루 한 번이라도 줘 받나? 내 생일을 알까? 내 얼굴은 기억했을까? 난 그 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이웃집 아저씨 같았어. 내 아버지를 다른 여자 집에 가야 볼 수 있다는 것, 그 아이 책상 위에 놓인 일본 학용품들, 너무 부러웠어. 난 엄마와 단둘이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자기 죽으면 그 아들만 걱정 됐대? 난? 난? 난 왜 안중에도 없었나? 왜 자기가 좋아 살림차린 여자가 낳은 아들을, 자기가 버린 본처 딸에게 부탁하는데? 철이와 동갑인 나는 왜 부탁 안 했는데?"
한번 마중물을 받은 내 안의 분노는 폭포가 되었다. 예순이 넘은 나는 다섯 살, 일곱 살, 열한 살의 초등학생,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분했다. 슬픔이 가슴을 치는지 아팠다. 이 나이에도, 또 아팠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았다는 것,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
나와 언니들은 나이 차가 많다. 큰언니는 나와 16살, 둘째 언니와는 14살, 셋째 언니와는 12살 차이가 난다.
딸 셋을 낳고 (엄마가 딸만 낳았기에 망정이지,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무슨 핑계로 첩 살림을 차렸을까? 아버지는 엄마와 한 집에 살던 7년 짧은 그 기간에도 수도 없이 다른 여자를 찾았다고 한다. ) 아버지가 집을 나가 딴살림 차리고 12년 만에 잠깐 들러 태어난 게 또 딸, 나였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여자도 임신을 하여 나와 한 달 차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엄마의 속이 어땠을까?
내가 항상 듣고 자란 말이 있다.
"하나 달고 나오지."
하나 달고 나오지 않은 내 죄책감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까?
엄마는 아들 못 낳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버지의 부탁이어서였을까? 자신의 호적에 들여서 그 아이는 호적 상 내 남동생으로 올라있다. 그리고 한 달 차로 입적할 수 없으니 그 아이는 일 년 후로 생일을 올렸다.
그 후로도 또 한 명의 남동생이 호적에 올라와 호적 상 남동생이 둘이다.
생전에 엄마가 깊은 한숨을 쉬며 자주 하던 한탄조의 말이 두 가지가 있었다.
남학교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나올 때 그렇게 부럽더라며, "저 많은 아들 중에 내 아들이 하나 없다."
수많은 주택(그 시절엔 모두 주택이었다.)을 보며, "저 많은 집에 내 집 하나가 없구나."
내 귀에 생생하다.
그리고 늘 죄송했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죄를 꼭 성공해서 엄마에게 집을 사드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젊은 아내를 버리고 집은 나갈 때 아버지는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친정이 잘 살아서 곁에 있으면 먹고살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저 여자는 나 없으면 아무에게도 기댈 언덕이 없다. 내가 보살펴야 한다."
(이게 말이니, 똥이니?)
엄마는 자존감이 없던 걸까?
그 시절 여자의 삶은 그런 거라고 받아들인 걸까?
우리 엄마가 1919년 생이니.
아버지 말대로 우리는 항상 외갓집 근처에 방을 얻어 살았고, 중학 시절부터는 일찍 결혼한 언니들 집을 돌아다니고 얹혀살며 학교를 마쳤다. 마치 할미꽃 전설의 할머니가 세 딸네를 돌아다녔듯이.
내 기억에 아버지를 본 것은 다섯 살 즈음의 한 장면이 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살고 있는 부산 집에 엄마와 함께 가서 한 번, 또 한 번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던 게 다다. 아버지를 만나면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손님이었다. 하룻밤을 주무시고 간 것 같은데,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 없이 엄마가 딸 넷을 어떻게 기르셨는지 상상할 수가 없다. 늘 가난했고 극도의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고기반찬 한번 먹지 못했어도 배를 곯지는 않았고, 엄마의 높은 교육열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아직은,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