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없애줄게
"얘들아, 너네 백내장 수술한 사람 있니?"
무려 네 명이 손든다.
"어머, 정말? 어때? 좋아?"
"난 광명 찾았어, 얘. 우리 약국에 오는 단골들에게도 수술하라 소개했잖니. 나 때문에 네 명이나 수술했어."
"나도 하고 났더니 좋더라."
대학 동기들 모임에서 한 이야기들이다.
남편이 눈이 침침하다고 병원 다니더니 백내장 수술을 권유받고 수술 후 경과가 좋았다.
최근 들어 갑작스레 나도 눈이 침침해져 생활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얼마 전 그림책세러피 강의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데 글씨가 안 보여서 당황하고 애를 먹었다. 병원에 가니 백내장은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며칠 후 운전 중 또 따갑고 침침하고 시야가 잘 안 보여 아주 곤혹스러웠다. 아무래도 다시 안과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백내장이든 노안 수술이든 눈 수술이란 자체가 좀 두려웠는데, 친구들 말을 들어 보니 안심이 된다.
묻는 김에 또 하나, 남편과 계속 의견 차가 나던 주제에 대해 물었다.
"얘들아, 혹시 장지 준비한 사람?"
(남편 주위에 부고 소식이 잦다. 우리도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여보, 우리도 장지를 마련하자. 사람 일 몰라. 갑자기 부모가 죽으면 장례 절차도 정신없을 텐데. 급히 장지까지 알아봐야 하면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우리도 선산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선산에 대해 주위에 들은 말이 많다. 한 세대만 지나도 선산 물려받은 장손이 팔고 산소 이장시켜 달라고 한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그동안 겪어본 바, 그다지 장손에 신뢰가 쌓이지 않은 형편에 선산에 묻힐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남편에게 늘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남편은 마이동풍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 싫어하고, 더군다나 화장이란 말도 싫어한다.
"화장하는 것 어때?"
"글쎄... 난 생각해 본 적 없어."
말을 끊는다.
난 굳세게 내 의견을 피력한다.
"산소 쓰면 누가 얼마나 찾아올 거야. 그나마 딸들도 늙어 다 죽으면 손녀들이 찾아와? 아이고, 여보세요. 왜 자식들에게 그런 부담을 줘. 적은 돈이라고 해도 관리비 부담 주고.")
친구들 여덟 명 중 대부분이 손을 든다.
"난 선산이 있어."
"난 벌써 20년 전에 사놨어."
"나도 준비했지."
장지 사놨냐는 질문에 아무도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냐는 친구는 한 명 없다. 우리가 그럴 나이다.
"난 네 구 들어가는 거 사놨어. 근데 그거 후회해."
"엉? 왜?"
"죽은 시신 화장까지 해놓고 뭐 하러 땅에 묻어. 자식들 힘들어."
"내 말이 그 말이야. 난 아예 뿌려서 흔적 없이 떠나자고 하는데 우리 남편은 죽는 이야기만 해도 손사래다. 그나마 화장하자는 이야기도 친구들 장례식에 다니더니 최근에야 조금 마음이 가나 봐. 아직까지도 매장하고 싶어 해. 죽은 몸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지."
"난 화장 후 아예 바로 뿌리라고 할 거야. 화장터에서 바로 연결해서 가는 곳이 있단다."
"아, 허가받은 바다나 산이 있다고 들었어."
"바다는 뭐 하러 돈 쓰고 시간 쓰고 가니? 화장터 바로 뒤에 허가받은 산이 있다는데 거기 뿌리지."
"맞다, 얘. 그 화장해서 받는 항아리에 들은 것도 시신 전부가 아니래."
"어머, 그럼?"
"사람을 화장하면 그 양이 많단다. 그래서 일부만 담아 주는 거래."
"나머지는?"
"모르지. 처리하는 거겠지."
어차피 일부만 받아서 그걸 모시자는 건데. 자기 시신 아무 데나 버려진다고 생각해서 감히 뿌리는 건 생각도 못하는 우리 남편에게 전해야겠다.
"납골당에 구더기 슨다는 말 들어봤니?"
우리 대화는 더 노골적이고 거리낌이 없다.
"들었어. 그래서 요즘에는 비닐에 밀봉해서 넣어준다더라."
"아이고, 그렇게 까지 해서 보관하고 모셔달라 하는 마음이 뭘까?"
"자식들이 얼마나 찾아오겠다고, 뭐가 그리 그립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부모 찾아가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을 세상 무너지게 슬펐는데, 잊게 되더라. 바쁜 세상이야."
"그리고 그 무덤도 길어야 몇십 년이래. 그때 다시 거두어이장하든지 처리하든지 하는 거잖아. 그걸 왜 자식들에게 부담주니?"
"난 우리 딸에게 물어봤어. 엄마 아빠 무덤 만들지 않고 없애는 거 어떠냐고 했다. 그랬더니 딸이 그건 좀 서운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근데 부모 죽는 거엔 (내가 물어놓고도) 사무적으로 말하는데 좀 서운하더라. 내 이중성? 하하. 남편 하고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데 자식들이 감정 없이 말하는 건 좀 기분이 다르던데?"
(남편이 나와 죽음을 이야기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 그리고 말이야. 요즘 장례식도 삼일장 안 하는 집 많아졌단다. 하루에 한단다. 삼일장까지 하는 것도 다 소용없어."
"그래, 삼일장에 몇천만 원씩 쓰고 그거 뭐 하러? 그것도 결혼식 부조금처럼 회수 차원? 하하."
"그거 좋네. 스몰웨딩처럼 장례문화도 간소화 실용적으로 변하는구나."
이번에는 대화가 널을 뛴다.
"너네 명절에는 어떻게 하니?"
"내가 다 준비해 놓고 아들 내외가 와. 매년 명절 앞두고 아들이 전화를 해. 몇 시에 가면 되냐고. 무슨 식당 예약하는 것 같아."
"하하하하"
"그럼 며느리가 음식을 해오지도 않아?"
"감히 어딜 며느리에게 음식 해와라, 와서 뭐를 해라 소리를 하니?"
"그래 우리는 젊어서 명절에 실컷 했잖니? 애들 데리고 가서, 남편은 자기 집이라고, 고향 친구 만난다고 나가 술 마시고 놀고, 종일 텔레비전 보고."
"난 명절에 매년 여행 간다."
"며느리 친정에 가라고?"
"응."
"얘, 얘. 그럼 사돈이 힘든 거 아냐? 시어머니는 여행 가고 자기만 애들 치다꺼리한다고."
우리 대화는 명절에 결혼한 자식이 오는 것이 피차 힘들다는 무언의 합의가 있는 거였다(?). 하하하.
앞으로 올 죽음과 사후 수습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니 절차가 쓸데없이 형식적이고 허례가 많다. 이제 우리 세대는 딸과 아들 며느리에게(사위는 아예 별 외인걸 보니 여전히 내 의식 가운데 가부장적 잔재가 많다) 명절 음식과 차례와 제사를 없애주고, 노후 돌봄을 없애주고 이젠 장례 절차와 성묘까지 정리해주려고 한다.
얘들아, 너네 편히 살아라.
그리고 있을 때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