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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Aug 11. 2022

I. 베네치아,
소녀에게 음악을 열어준 물의 도시

안나 본 디 베네치아 | 제1편

그 사람은 독일에서 문학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독일의 문학계를 발칵 뒤집은 그는 지금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빛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편에 위치한 교회를 향해 걸어갔다. 평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가봐야 하는 그곳,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Ospedale della Pietà로. 명성에 걸맞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한 정기 콘서트가 열리는 교회의 한 편에 앉은 그의 눈에 바로 들어온 것은 세밀한 장식으로 가득한 거대한 격자였다. 그 격자를 자세히 바라보니 격자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수십 명의 아이들이었다.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격자 사이사이로 아름다운 노래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녀리면서도 달콤한 목소리. 바로 여자 아이들이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는 드디어 그 격자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Mulier taceat in ecclesia.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하라.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이 금지된 여자들. 하지만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여자들은 달랐다. 여자라기엔 너무나도 뛰어난 음악 실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규칙을 깨고 이례적으로 여자에게 노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대신 거대한 격자로 이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숨겨놓은 것이다. 남자는 생각하였다. 격자 뒤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소녀들이 마치 예쁜 새장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눈부시게 푸르른 베네치아에서 만난 예쁜 새장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지롤라모 본 Girolamo Bon은 긴 순회공연을 마치고 뱃속에 새로운 생명을 키워나가는 아내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매서움을 조금씩 누그러뜨리는 바람이 마치 코 끝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바다 내음 가득한 자신의 고향 바람 같았다. 운하로 촘촘히 엮인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도시인데도 흰 눈으로 반짝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흑청색의 물빛과 함께 왜 그렇게 매서운 분위기를 품어내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자신의 고향을 가득 채운 에메랄드빛 물빛을 사랑해서 그럴 것이다. 자랑스러운 베네치아의 시민인 지롤라모는 예술과 향락을 사랑하는 러시아의 여제, 안나 이바노브나 Anna Ivanovna의 초대로 가족들과 함께 몇 년 동안 머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뒤로한 채 만삭이 다가오는 아내의 고향, 푸른 하늘 아래 붉은 벽돌 탑이 가득한 도시, 볼로냐로 계속 전진하였다. 


지롤라모 본처럼 다양한 재능을 겸비한 남자는 없을 것이다. 세상 만물을 오직 붓과 물감으로 오롯이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세상을 화폭에 담아내기에는 그저 너무나 작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커다란 캔버스를 찾았다. 자신이 직접 창조한 세계를 어느 사람이든 거닐 수 있는 거대한 캔버스, 바로 '무대'라는 캔버스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무대를 직접 건축하며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기를 즐겨하였다.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보니 더 마법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기계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완벽한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다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겨 직접 자신만의 캔버스에 펼쳐질 이야기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대본을 만들다 보니 자신이 창조한 대본은 자신만이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자신의 세계를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롤라모 본은 자신을 소개할 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되었다. 자신은 화가이자 무대 건축가이자 연출자, 기계공이자 대본 작가, 그리고 음악 감독이라는 긴 소개를 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지롤라모는 평생 함께 할 사랑하는 반려자, 로사 루비네티 본 Rosa Ruvinetti-Bon과의 만남은 분명 음악의 여신이 이 둘을 이어 주기 위해 미리 점찍어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자신의 독창적인 무대 위에 오른 이 여성의 노래를 듣는 순간 자신의 세계에 이 여성을 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이 두 사람은 이윽고 이탈리아 거장들의 오페라 레퍼토리로 프로그래밍한 완벽한 오페라 연주회를 기획하여 세간에 큰 호평을 자아냈다. 그때부터였다. 이 부부 예술가가 이탈리아 오페라 순회 공연단을 만들며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간 것은. 지롤라모 본과 항상 그 옆을 지키는 소프라노 가수 로사 루베니티 본, 그리고 국경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항상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하는 딸과 함께하기로 한 아버지, 스테파노 루베니티 Steffano Ruvinetti는 각 도시의 시장과 여관 한복판에 직접 나무 무대를 하나하나 설치하여 이탈리아의 오페라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그들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폴리와 베네치아에서 탄생해 가장 뜨거운 유행을 불러일으키는 막간극 Intermezzo과 오페라 부파 Opera buffa 이탈리아 엘리트 연주자들을 만나 휘황찬란한 고품질의 무대 위에 올리니 그 누가 이 진귀한 무대를 안 보러 오겠는가. 이들의 명성은 동쪽으로 퍼지고 퍼져 결국 러시아의 여제, 안나 이바노브나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이 가족 오페라 순회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곱씹으며 앞으로 나가던 지롤라모는 드디어 긴 도로 끝에 보이기 시작한 붉은 벽돌 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 볼로냐에 당도한 것이다. 배가 더 부르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라 생각한 지롤라모는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훨씬 온화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볼로냐의 성문을 넘게 되었다. 한동안 비었던 그들의 집에는 다시 한번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다시 음악이 넘치기 시작한 그 집은 그로부터 6개월 후 아기의 울음소리도 함께 흘러넘치기 시작하였다. 만삭이었던 로사의 품에 뽀얀 피부와 불그스름한 뺨을 가진 아기가 안기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여제에게 감사함을 느꼈던 걸까. 고심 끝에 소중한 딸아이는 그 여제를 따라 '안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어 볼로냐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며 정식으로 기록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부부는 고된 방랑자의 삶에서 벗어나 여느 가정집처럼 모처럼 한 곳에 정착한 평범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푸른 하늘 아래 언제 지어졌을지도 모르고 어느 용도로 사용됐는지도 모르는 붉은 벽돌 탑들이 인상적인 볼로냐 안에서 부부의 사랑하는 딸아이, 안나 본 Anna Bon은 아름다운 청회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흡수해갔다. 어머니의 청아한 노랫소리, 아버지의 즉흥 연주, 그렇게 안나 주위를 가득 채운 안나만의 세상. 이 모든 것을 흡수한 안나는 이윽고 어머니의 음악 소리를 따라 함께 옹알거리고 아버지의 즉흥 연주에 햇살 가득 담은 눈망울로 손을 꼼지락거렸을 것이다. 지롤라모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딸을 바라보며 딸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를 꼭 닮은 온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딸과 함께 이중창을 부르는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그 이중창에 합세하는 자신까지 3명이 함께 음악을 만들어내는 삶을. 그래서 지롤라모는 결정하였다. 딸아이가 이윽고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되며 음악에 대한 애정을 깨닫는 나이에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고향, 베네치아로 아이를 보내겠다고 말이다. 전 유럽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자에게 열려있는 베네치아의 음악 학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로.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중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좌)와 성 라자로 오스페달레 (우)의 정경


적어도 14세기부터 존재한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Venetian ospedali'는 '베네치아 병원'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고아와 미혼모, 그리고 빈민과 같은 취약계층을 위해 의료, 요양과 같은 선정을 베푸는 복지 기관이었다. 베네치아의 각 지역구마다 있던 수많은 오스페달레 중 4개의 오스페달레는 특히 힘없고 약한 여자 고아들에게 집중하였다. 그리고 결국 이 아이들을 품에 안을 고아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 아이들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게 되었다.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Ospedale della Pietà, 오스페달레 델린쿠라빌리 Ospedale degl'Incurabili, 오스페달레 디 산타 마리아 데이 데렐리티 Ospedale di Santa Maria dei Derelitti, 그리고 오스페달레 디 산 라자로 데이 멘디칸티 Ospedale di San Lazzaro dei Mendicanti의 수많은 방은 이윽고 여자 아이들의 보석 같은 웃음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점점 그 규모를 넓혀나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소외된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때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청아하고 푸른 보석 같은 베네치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서양 고전 음악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는 분명 인쇄술이지 않을까 싶다. 더 많은 대중들에게 지식을 보급할 수 있는 인쇄술은 독일에서 태어나 이윽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 새로운 기술에 매혹된 남자, 오타비아노 데이 페트루치 Ottaviano dei Petrucci 또한 이 기술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 위해 최고의 기술을 가진 베네치아로 향하게 된다. 


이윽고 베네치아에 당도한 페트루치는 베네치아의 한 성당에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을 중요한 또 하나의 학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이미 페트루치가 이 푸른 도시에 당도할 당시, 도시 내의 수많은 성당을 중심으로 겸허하고 섬세한 교회 음악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한 사람이 신을 향해 부르는 단아한 노래는 성당 벽에 수없이 부딪히며 마치 음악이 온몸을 감싸는듯한 그 신비로운 음향을 페트루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악을 접하는 와중에 페트루치는 신성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과 다르게 인쇄물을 사랑하는 페트루치의 눈에는 이 가수들의 노래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악보에 눈이 갔을 것이다. 목판으로 새겨 조악한 품질을 자랑하는 낡은 악보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 그 순간 페트루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었다. 


베네치아에 당도하여 8년 동안 열심히 인쇄술을 연마한 페트루치는 어느새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1498년, 조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나 이젠 어엿한 베네치아의 인쇄 장인이 된 이 남자는 베니스의 총독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고선 총독을 향해 당당하게 청원하였다.「저에게 향후 20년간 악보를 인쇄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시옵소서.」 총독은 흔쾌히 허락하였을 것이다. 인쇄술이 막 발달한 이 시기에 모두의 눈은 글자를 향해있지 악보로 향하지 않았으니까. 


기존의 정량 기보법으로 표기된 악보(좌)는 수작업을 통해 세밀하게 작업하였다면, 페트루치 이후 (우)부터는 세밀한 금속 활자를 통해 대량으로 악보가 생산 가능하게 되었다.


독점권을 허락받은 페트루치는 그 즉시 정교한 금속 활판을 만들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밀한 악보를 창조하게 되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세밀한 표현은 그 당시 음표 주위에 조그마한 점 하나에도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량 기보법 Mensural notation으로 새겨진 악보를 정확하게 인쇄하는데 제격이었다. 페트루치는 자신이 개발한 이 세밀한 인쇄술을 즉시 당시 베네치아를 지배한 플랑드르악파의 다성음악 작품에 적용시켰다. 페트루치가 개발한 세밀한 활자 악보로 새롭게 탄생한 베네치아의 다성음악 작품 모음집은 순식간에 수많은 양이 생산되어 베네치아를 휩쓸게 되었다. 물론 얼마 안 되어 주변국까지 그 악보들이 퍼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페트루치의 이 혁신은 결국 베네치아의 음악을 보급화시켰으며 베네치아라는 도시는 세기가 바뀌며 순식간에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격상하였다.




음악의 중심지가 된 베네치아는 나날이 융성해졌다.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웅대하고 입체적인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아 카펠라는 베네치아의 자랑이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찾기 위해 베네치아를 찾아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베네치아 정부는 생각하였다. 어떻게 해야 이 아름다운 음악을 더 극적인 효과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규율에서 조금 벗어나기로 하였다.「Mulier taceat in ecclesia.」 여자는 교회에서 오직 침묵을 고수하라는 이 경건한 규율에서. 남자로만 이루어진 합창단에 여자가 서로 어우러지면 얼마나 더 극적인 음악이 탄생하게 될까. 그래서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이례적으로 여자에게 음악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것도 정부가 관리하에 생활하는 가장 낮은 위치에 위치한 여자 아이들, 바로 오스페달레에서 지내고 있는 고아들 앞에 우선적으로 음악의 문이 열린 것이다. 정부의 후원 하에 공식으로 저명한 스승 밑에서 음악을 만난 고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성장하였다. 이윽고 이들은 교회에 서서 신을 영접하기 위해 교회로 모여든 신자들에게 천상의 하모니로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명을 안겨주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그리고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이 원하는 하늘에 가까운 가장 극적인 찬미가가 완성된 것이다. 


아름다운 장식 격자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자 아이들은 16세기 중반이 되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하나의 명물이 되었다. 오스페달레를 유지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지만 이 아이들의 실력은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여 이제는 이를 웃도는 수입을 자랑하게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운 베네치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더 많은 음악을 구사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더 많은 저명한 음악가와 작곡가를 고용해 이 아이들에게 연주법, 시창, 청음과 같은 기본적인 음악 훈련은 물론, 성악과 기악까지 음악에 관한 모든 교육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4개의 베네치아 오스페달레는 더 이상 고아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제는 여자들을 위한 어엿한 음악원이 되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여자 아이들에게 문이 열려있는 음악원. 자랑스러운 베네치아인 지롤라모 본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닮은 사랑스러운 자신의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선사해주기로 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제피로스가 따뜻한 서풍을 몰고 에메랄드 빛 수면을 간지럽히는 1743년의 어느 봄날, 안나는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스테파노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음악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앞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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