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아 | 제2편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누가복음 1:45~49
거리 곳곳을 지키던 신성한 이콘들이 끊임없이 파괴되어 그 파편들만 나뒹구는 그 세상에 '카시아 Kassia'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라틴어 '카시우스 Cassius'에서 유래한 이 이름의 뜻은 '공허한' 혹은 '허무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허망한 뜻을 지닌 이름은 옛날, 풍요로운 로마의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이름을 상징하기도 하였으니, 아마 카시아의 부모는 전자의 뜻보단 후자의 뜻으로 자신들에게 찾아온 이 사랑스러운 딸의 이름으로 선정하였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카시아는 콘스탄티노플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총명하게 성장하였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민담이 담긴 난해한 고전 그리스 문학을 이미 어린 나이에 통달한 그는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영성시를 창조해 나갔다. 남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창조'라는 놀라운 인간적 행위를 향유할 수 있는 '남성'만큼, 아니 어쩌면 그 남성들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이 조그마한 여자 아이가 창조해 내다니. 복잡한 그리스 문학을 창조해 내는 것도 상당한 지식을 요구하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음악을 곁들여 눈 깜짝할 새 노래로 지저귀는 여자 아이는 확실히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렇게 놀라운 재능으로 남자들을 깜짝 놀라게 여자 아이의 이야기는 어느덧 한 수도사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종교적 요충지인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수도원장,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르 Saint Theodore the Studios'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수도원장은 자신이 이끌어나가는 수도원을 예술의 성지로 탈바꿈시켰다고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그는 양피지에 아름다운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서예 기술의 한계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아름다운 기술로 지식의 보고들을 담아낸 수려한 책들은 수도원의 책장에 차곡차곡 모여 어느덧 비잔티움에서 가장 장엄한 도서관 및 기록보관소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이 수도원이 소유한 서예 기술로 만들어진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그 책에는 그가 사랑하는 고전 그리스 문학, 그리고 비잔티움을 영성의 사회로 성장시킨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논문과 종교시, 그리고 그 시들을 음악이라는 그릇에 담아낸 찬송가의 악보들이 필사되어 담겼다고 한다. 그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이 수도원장에게, 아무나 배울 수 없는 그 어려운 그리스 고전 문학에 전통한 카시아라는 여자 아이는 그의 흥미를 이끌어 내었을 것이다.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르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뒤흔든 여자 아이를 자신의 제자로 삼은 것이다. 이미 어른의 지식을 조그마한 머리에 담아낸 이 아이는 성 테오도르라는 영성의 스승을 만나 점점 문학과 음악에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지성을 일구어 나갔다고 한다. 도시의 만연한 남성 시인들과 다르게 여성의 관점으로 써 내려간 이 아이의 시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독창성과 창조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르는 나이에 맞지 않는 이 아이가 써 내려간 아이의 에피그램 Epigram* 과 영성으로 가득한 시에 점점 빠져들었다고 한다. 세상에,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학식이 높고 저명한 학자가 어린아이의 시에 큰 감명을 받다니.
* 에피그램 Epigram : 흥미를 유발하는 짧고 간결한 풍자 시. 짧은 산문으로 이루어진 이 문학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장르로 손꼽힌다.
보잘것없는 자그마한 어린 여자 아이임에도 동등한 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 성 테오도르, 그리고 그런 스승을 진심으로 따른 카시아는 진심으로 스승을 존중하며 예술과 지혜의 그릇을 빚어나갔다. 세월이 흘러, 카시아는 이윽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하여 도시의 가장 이질적이고 독특한 빛깔을 가진 보석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성인이 된 카시아의 이야기를 펼치기 전, 한 가지 짚고 갈 이야기가 있다. 바로 카시아가 어린 시절부터 극진하게 모신 영성의 스승,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르가 콘스탄티노플을 움직일 수 있는 저명한 종교자였음은, 이 글을 읽은 모두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영적 지도자인 그는 자신의 지위적 위치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그는 성상옹호론자였다. 그리고 카시아 또한 스승을 따르는 성상옹호론자였다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며 강한 햇살에 점점 무르익을 즈음, 찬란한 붉은 벽돌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한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새로운 황제가 영광의 왕좌에 앉은 지 9년이 지난 올해, 황제의 곁을 평생 함께할 황후를 맞아들이기 위해 태후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비록 계모였지만 그 누구보다 정성으로 황제를 보필했던 태후의 이름은 에우프로시나 Euphrosyne. 젊은 시절, 수도원에서 평화를 만끽하던 그는 선황제에게 억지로 이끌려 그의 곁을 지키는 배우자가 되어 세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에우프로시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자의든, 타의든 황후라는 이름과 함께 찬란한 콘스탄티노플의 황좌 옆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렇게 황후가 된 에우프로시나는 온갖 비난을 받고 오른 자리인 만큼 의붓아들에게 원망을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인데, 황후는 그저 아들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묵묵히 힘쓸 뿐이었다. 세월은 흘러, 에우프로시나의 노력으로 그의 의붓아들, 테오필로스 Theophilos는 무사히 황제를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 찬란한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 불려 가는 아리따운 처녀들의 발걸음이 빈번해지자 사람들은 항간을 흔든 소문이 실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궁전 내에서는 사랑하는 황제를 위해 태후가 직접 만나 선별한 신부 후보들이 추려져 목록이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성, 지혜로운 여성,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여성에 고귀한 가문의 여성들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보석 같은 여성들은 황제의 간택을 받을 그날을 기다렸다. 찬란한 도시에 자부심을 가진 시민들은 젊은 황제 곁을 함께할 새로운 황후의 탄생에 기대심을 부풀렸다고 한다. 물론 아름답고 지혜롭게 성장한 카시아 또한 태후의 눈에 들어 신부 후보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그렇게 선발된 신부 후보들은 비잔티움의 관례대로 '신부 대회 Bride show'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궁정의 한 자리에 모인 아리따운 여성들 중 황제의 눈에 든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황후로 발탁될 수 있는 기회. 예로부터 왕실의 전통이었던 이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여성들은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황제의 눈을 사로잡기 위하여 미리 아름다운 옷과 희귀한 장신구를 구해 자신을 꾸미는데 노력했을 것이다. 카시아는 이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 아마 이 여성은 황후의 자리보다 스승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문학과 음악에 더 파고들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날이 되었다. 비잔티움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들은 힘껏 치장하여 고귀한 궁전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신부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궁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태후 에우프로시나는 한 명씩 모여드는 수많은 신부 후보 중 유독 한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후보는 바로 자신의 의붓딸이었다. 태후는 자신의 의붓딸 또한 신부 후보로서 신부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태후는 그 어느 여성보다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의붓딸을, 황제가 간택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회가 무르익어가며 각 사람들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 차 뺨이 붉게 상기되며 황제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우프로시나 또한 황제의 선택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리의 주인공이었던 젊은 황제는 태후의 바람과 다르게 왕좌에 앉아 오직 한 여자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가파른 절벽에 피어나 더 탐스럽게 보이는 단 한 송이의 꽃, 어서 그 높은 절벽에 올라 자신의 품 속에 안고 싶은 그 꽃을 닮은 여자. 황제는 생각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혹당하게 되는 저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라면, 정결하고 깨끗한 자신을 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이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저 여자와 함께라면 기꺼이 원죄의 골짜기로 함께 나아가겠다고.
드디어 젊은 황제는 일어나 샛노랗고 반짝이는 황금 사과를 들고 앞으로 향하였다. 신부 후보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은 황제의 발걸음에, 황제의 눈빛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여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카시아 앞까지 나아와 서게 되었다. 젊은 황제는 붉은 뺨과 환희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 앞에 있는 탐스러운 여성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손에 든 선악과를 손에 쥐어주며 말을 건넸다.
「Ἐκ γυναικὸς τὰ χείρω」
'여자를 통해 죄악이 태어난다.'
고귀한 자신을 죄악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이브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카시아를 바라보며 던진, 황제의 최고의 찬사였다. 황제라는 위신을 저버리며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고백을 던진 황제는 상기된 눈빛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입술로 나올 첫마디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여성의 입술은 그저 꾹 다문 채 입가에는 아름다운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황제가 건넨 선악과를 바라보며 만지작거리던 여성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Kαὶ ἐκ γυναικὸς τὰ κρείττω」
'하지만 여성을 통해 더 좋은 것이 나왔지요.'
회중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꺼낸 카시아의 대답은 의외였다. 카시아가 던진 한 마디에 모든 사람들은 의미를 모른 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 몇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선 다급하게 두려운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우려대로 황제의 눈에 담긴 황금빛 환희는 어느새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차가운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제 그 자신은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한평생의 사랑을 고백하였는데 한낱 이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고백에 대한 반박이었다. 아니, 반박을 넘어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카시아는 황제가 상기된 얼굴로 던진 고백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를 통해 죄악이 태어났다는 말에 자신도 알 수 없는 분노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이브라는 여자를 통해 죄악이 태어났을지라도, 인간의 원죄를 유일하게 용서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 또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통해 내려올 수 있지 않았던가.
존귀하신 성모 마리아시여. 하늘에 계신 주와 성모 마리아에게 신실한 마음으로 경외하던 카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반박할 뿐이었다.
그날 펼쳐진 신부 대회는 결국 태후 에우프로시나의 바람대로 진행되었다. 황제는 카시아의 손에 들린 황금 사과를 거칠게 거둬버렸다. 그리고 그 황금사과는 결국 다른 여성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신부 대회는 마무리되었다. 에우프로시나의 의붓딸, 테오도라 Theodora는 그날 황제가 건네준 황금 사과를 건네받고 그의 곁을 평생 함께 할 황후로 발탁되었다. 모든 회중들은 아름답게 엮인 황제와 테오도라를 축복하였다. 물론 카시아 또한 진심으로 이 두 사람을 향해 축복하였지만, 황제는 단 한 번도 카시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쇼는 끝났다. 카시아는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테오도라는 830년 6월 5일에 황후가 되어 콘스탄티노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어느새 신앙은 사라지고 오직 파괴만이 있는 비잔티움을 조금씩 변화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나저나, 선황제를 따라 파괴를 일삼은 황제는 알고 있었을까.
그가 첫눈에 반한 여자도, 평생 그의 곁을 지켜주게 될 여자도 성상옹호론자였다는 것을.
결국 이 두 여자는 자신의 이상적인 비잔티움을 구축하는데 결코 협력하지 않았을 것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