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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Oct 29. 2022

II. 국왕 일가를 위해 건반에서 손을 땐 피아니스트

엘렌 드 몽주루 | 제2편

크라머와 엘렌의 스승이었던 클레멘티가 이 젊은 청년이 가진 음악적 자질을 자랑스럽게 칭찬했던 것을 엘렌은 떠올렸다. 크라머의 아버지는 본디 독일인이었지만 자신의 바이올린에 열광하는 섬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로 향했다고 한다. 몇 백 년 전만 해도 독자적인 음악으로 유럽 대륙을 놀라게 했지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이후로 위대한 음악가를 찾을 수 없어 점점 뒤처져가는 영국을 위해 크라머의 아버지는 섬과 대륙을 건너가며 변해가는 유럽의 음악을 영국으로 전파하였다. 그렇게 크라머의 아버지, 빌헬름 크라머 Wilhelm Cramer는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헨델의 전철을 밟아 런던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곳은 자신이 사랑한 영국의 런던이 아닌, 유럽의 새로운 음악의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독일의 만하임이었다. 아버지가 런던에 떠난 후 만하임에 남았던 어머니는 요한까지 태어난 마당에 얼른 런던에 자리 잡은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어린 아기는 그 짧은 도버 해협을 건널 뱃여정 조차 힘들었기에 어머니는 아이가 바다를 건널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 년, 또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어느덧 3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한 손으로 요한의 손을 꼭 잡은 채 거친 바다를 건너 아버지에게 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독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섬나라 특유의 애상적인 생동감이 느껴졌다.


클레멘티에게 이미 모든 것을 전수받은 이 남자가 왜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 하는지 엘렌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클레멘티에게 배움을 청하고 지금은 두세크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엘렌은 분명 클레멘티 선생이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의 제자에게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띄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스승의 의도대로 엘렌은 이 남성을 자신의 제자로 받기로 수긍하였다. 그렇게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는 엘렌 드 몽주루라는 여성의 학생이 되어 새로운 수업을 받게 되었다.


크라머는 반신반의한 몽주루 선생이 레슨 때마다 어디에서 볼 수 없는 정교하고 새로운 피아노의 주법과 기교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제야 왜 클레멘티 선생이 엘렌 드 몽주루라는 여성에게 배움을 요청하라고 권했는지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크라머는 이윽고 새로운 선생이 요구하는 기교를 배우는데 한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우선 몽주루 선생의 그 정교한 기교는 선대 음악가들의 음악 작품으로는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 선대 음악가들의 작품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닌 그 시대에 성행한 악기의 한계 때문이었으리라. 하프시코드를 인생의 악기로 삼은 선대 음악가들의 작품은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피아노와 그 상성이 많이 달라 간혹 그 주법이 작품에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존재하였다. 크라머는 이러한 사소한 한계 때문에 선생이 지닌 음악의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다는 점이 탐탁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크라머는 엘렌 드 몽주루 선생에게 하나를 청하게 된다.


「선생님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담은 작품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엘렌은 자신을 잘 따라주는 제자에게 감사함, 그리고 자신에게 배움을 갈망하는 제자에게 기쁨을 느꼈을 것이라. 엘렌은 그날부터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신식 악기, 피아노에 대한 교육과 기교를 담은 작품에 집중하게 되었다. 1788년, 서양 고전 음악사를 뒤집을, 피아노만을 위한 정교한 연습곡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엘렌은 사랑하는 천재 제자 크라머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처음 접하는 일반 학생들을 위한 음악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악보는 보는 학생들을 위해 착실하게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악상 기호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처음 피아노의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학생들을 위해 두 손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 현악기의 피치카토* 주법을 그대로 건반에 옮겨놓은 듯한 독특한 아티큘레이션 등 피아노에서만 연주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구를, 자신만의 음악으로 작곡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엘렌 특유의 꼼꼼하고 오밀조밀한 멜로디는 피아노를 관찰하기 좋아한 그의 성정과 맞아떨어져 어디에서 볼 수 없는 정교한 연습곡이 하나 둘 차곡차곡 쌓여나가기 시작하였다. 


피아노라는 거대한 열풍을 일으킬 악기를 탐구하며 사교계에서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윽고 엘렌을 비롯해 파리에 머무른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분신과 같은 음악 활동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엘렌의 인생에 이정표를 가리킨 제자 크라머는 피아노라는 악기에 새로운 눈을 뜨게 도와준 선생님과 잠시 헤어져 독일로 향하였고 엘렌의 스승이던 휠만델과 뒤섹은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향하였다. 모두의 사랑을 받은 엘리자베스 르부룅의 저택은 불시에 습격당했으며 예술의 거름이 되어준 그의 살롱은 잠정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게 되었다. 항상 떠들썩했던 사교계의 음악가, 엘렌 드 몽주루의 주변은 점점 휘휘해져 어느덧 파리에는 자신을 비롯한 몇몇의 예술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1789년,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성채, 바스티유 요새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시민들의 손에 결국 무너져 바야흐로 프랑스는 큰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피치카토 Pizzicato :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같은 찰현악기에서 현을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주법




17세기, 리슐리외 추기경의 제안으로 감옥으로 사용된 바스티유 요새의 함락은 프랑스혁명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이제 황혼에 접어들기 시작한 남편은 평생 조국 프랑스를 위해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바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대부분을 바친 그의 직감은 무의식적으로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는 것을. 훌륭한 남편을 보필하는 어린 아내 또한 그가 본래 가진 예리한 통찰력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사교계를 드나들며 우연히 귀에 들려오는 조국 프랑스의 정세는, 결국 사랑하는 프랑스가 어떤 길을 향할지 또렷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프랑스는 이제 귀족과 사제, 평민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평등 아래 정당한 인권을 가진 '시민'의 존재, 그 존재가 조국 프랑스가 원하는 존재였다. 프랑스의 미래를 엿본 후작 부부는 조용히 세상의 변화를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몽주루 후작 부부는 평소 살롱에서 자주 만났으며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이끈 장 실뱅 바이 Jean Sylvain Bailly의 서클에 자주 방문하며 조국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서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혁명을 맞이한 첫 해 겨울, 후작 부부는 수많은 진보 정치가들과 시민이 모여 창단된 ‘헌법을 위한 친구들의 모임 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에  함께 가입하여 평등 아래 많은 시민들과 함께 프랑스를 위해 자신들을 바쳐나갔다. 


한편 엘렌 드 몽주루는 남편과 함께 다닌 수많은 서클에 소속된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혁명에 지친 수많은 이들에게 잠시의 여유를 선사하고 싶었던 엘렌은 이윽고 자신의 재능을 바쳐나갔다. 그가 가진 아늑한 피아노의 소리는 험악한 파리 속 지친 이들에게 맑은 샘물처럼 찰나의 환희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비록 절친한 동료, 비오티와 준비한 합동 공연 직후 비오티와 정치 신문이 벌인 싸움에 휘말려 결구 신문사로부터 차마 입으로 꺼내기도 부끄러운 비난─엘렌 드 몽주루는 음란한 하프시코드 연주자다.─을 던져 엘렌에게 더 이상 음악 활동을 이을 수 없는 상황도 닥쳐왔지만 그는 몽주루 성에 근신하면서도 연습곡을 작곡하며 자신의 음악을 단 한시도 놓지 않았다고 한다.


1791년 6월 21일, 루이 16세와 그 일가가 국외로 도주하다 잡힌 '바렌 도주' 사건으로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엘렌이 근신하며 작곡에 열중하던 와중, 이제는 '헌법을 위한 친구들의 모임’보다 ‘자코뱅파 Club des jacobins’로 불리기 시작한 자신들의 정당에서 미세한 분열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렌에게 전혀 달갑지 않은 움직임이 말이다. 선천적으로 귀족이었던 이 엘렌과 몽주루 후작이 어떻게 이 자애로운 군주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군주가 당연히 지켜야 할 자신의 조국을 버리려고 했다고 해도 말이다.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그 일가가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국외로 도주하다 생포된 ‘바렌 도주 La fuite à Varennes’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자코뱅파 내에서 일부 당원들이 루이 16세가 지닌 군주의 권리를 몰수해야햐한다는 폭력적인 청원을 발표하게 되며 자코뱅파는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대다수의 자코뱅파는 이런 폭력적이고 가히 급진적인 제안에 수긍할리가 없었다, 이들은 급진적인 이들에게 폭력보다는 평화롭고 온건한 혁명의 길로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피로서 새 나라를 일으키자는 굳은 신념을 밀어나가는 그들에게 설득은 소용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온건한 혁명가들은 이들을 떠나 새로운 서클을 만들기 위해 튈르리 근처의 푀양 수도원에 모두 모여 그들만의 ‘헌법을 위한 친구들의 모임 창당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푀양파 Club des Feuillants. 자코뱅파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입헌 왕정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몽주루 후작 부부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닌 자신들만의 권리를 지키고 자신들의 군주를 지키기 위해 푀양파의 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리하여 몽주루 후작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온건파들은 부르봉 왕조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열성으로 활동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자신들의 태양, 루이 16세의 싸늘한 머리일 뿐이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귀족이 아닌, 당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던 일개 시민들이 직접 왕을 사형대로 보낸 것도 모자라 왕정제의 폐지까지 일으켜 당대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절실한 신하이자 군인이었던 앙드레 몽주루 후작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에 절규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태양과도 같은 군주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하늘에 떠있는 찬란한 태양을, 한낱 인간의 손으로 끌어내려 차가운 땅 속에 묻어버릴 수가 있는 건가. 그가 바라던 혁명의 모습은 결코 이런 천박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을 건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태양이 추락한 이후, 시민들이 다시 한번 직접 재판대에 죄인으로 세운 마리 앙투아네트를 어떻게든 똑같은 결말로 치닫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 눈앞에 하나의 길을 보여주었다.


1793년, 앙드레 몽주루 후작과 오랜 교류를 나눈 위그 베르나르 마레 Hugues-Bernard Maret가 나폴리의 대사로 임명되었다. 나폴리의 대사로서 나폴리라는 국외로 향하는 여정은 당연히 마레를 비롯하여 유럽에 큰 충격을 안긴 프랑스인에게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폴리 정부에게 왕비를 살리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은 마레는 몽주루 후작에게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몽주루 후작에겐 그야말로 구원과도 같은 부탁이었을 것이다. 군주를 지키지 못한 장군에게 군주가 사랑한 가족만큼은 꼭 살리겠다는 의지는 의무감을 넘어 후작에게 하나의 강박적인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레의 호위 요청에 흔쾌히 승낙한 몽주루 후작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렌은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건반에 손을 떼고 남편과 함께 함께 떠나기로 하였다. 엘렌 또한 그 누구보다 국민을 사랑한 자애로운 왕비를 단두대로 보낼 수 없었기에, 그리고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안광에 서리기 시작한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몽주루 후작의 실낱같은 희망은 얼마 되지 않아 스르륵 끊기고 말았다. 국경 너머 겨우 도달한 이탈리아의 노바테 메졸라 Novate Mezzola에 도착한 마레 일행은 그곳에 매복한 오스트리아군이 이들을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포박당한 엘렌은 충실한 프랑스의 신하인 마레와 자신의 남편이 거친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수많은 총구 사이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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