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드 몽주루 | 제3편
오스트리아군이 내려친 개머리판에 피할 새 없이 맞는 연약한 아이들.
끌려가는 남편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여자들.
한바탕 큰 소동 후 덩그러니 막사에 남겨진 나약한 이들의 눈물.
엘렌은 며칠 째 눈앞에 펼쳐진 그 참혹한 현장을 잊지 못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그날 엘렌은 오스트리아군의 폭력에 부상당한 엘렌은 다른 부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채 남편이 끌려간 메졸라 호수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오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잡혀간 남편과 상봉할 수 있을 테니. 가련한 약자들은 자신들의 어질러진 막사를 떠나 위험한 이탈리아 국경부터 일단 벗어나기로 하였다. 이탈리아 국경 너머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비코소프라노. 이들은 다소 안전한 그 도시로 향하여 가족들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평화로운 작은 도시, 비코소프라노는 습격받은 약자들을 환대하였다. 비록 프랑스의 높으신 이들의 가족을 돌봐준다면 훗날 큰 이익이 되겠다는 계산이 들어갔을진 몰라도 비코소프라노의 돌봄 속에서 엘렌의 상처투성이 몸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엘렌의 눈은 아직 저 국경 너머에 있을 메졸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호수만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그날의 검푸른 메졸레 호수에 자신의 마음을 둘 것인가. 엘렌은 무너진 나약한 마음을 다시 한번 주워 모아 굳게 세워 올리기로 하였다.
엘렌은 즉시 자신의 모든 인맥을 사용하여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베네치아의 프랑스 공사로 활동 중인 프랑수아 노엘 François Noël을 비롯하여 제노바, 피란체, 그리고 알베르토 드 리타 Alberto de Litta백작이 활동하는 밀라노까지 엘렌은 이탈리아 각 도시에서 활동하는 자신이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했다고 한다. 엘렌은 그 편지들을 적어나가며 많은 눈물이 방울방울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려 잉크가 번져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적어나갔다. 당시 알베르토 드 리타 백작에게 보낸 엘렌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남편과 헤어진 그 치명적인 날 이후부터 제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남편과 마레가 포박되어 총에 둘러싸인 채 끌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 오, 백작님, 이 얼마나 잔인한 순간입니까!
엘렌이 알베르토 드 리타 백작에게 보낸 편지 중 (1793. 7. 28)
하지만 이 편지는 알베르토 드 리타 백작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젠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그저 충혈된 채 말라버린 눈으로 힘겹게 적어 내려 간 엘렌의 눈물 젖은 편지는 단 한 통도 그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탈리아의 모든 우편이라면 거쳐가야 하는 도시 베네치아에서 엘렌의 편지들은 당국의 검열로 인해 중간에 가로채 압수되었고 결국 받아야 할 모든 이들에게 편지는 전달되지 못한 채 세상의 한 구석에 처박혀졌다고 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엘렌은 하염없이 답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어느덧 푸른 잎사귀가 만드는 푸른 풍광은 하루하루가 지나며 축축한 낙엽 향과 함께 알록달록한 풍광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엘렌은 검푸른 그날의 메졸라 호수로 향하는 눈을 애써 돌리며 그날도 남편을 구할 수 있는 단 한통의 답신만을 기다리던 와중 그날은 드디어 기다리던 그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고 한다. 엘렌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다소 거칠게 접힌 편지지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있었다. 애써 진정시킨 손이 다시 벌벌 떨리는 엘렌은 결국 편지지를 움켜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더 이상 말라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793년 7월, 메졸레 호수 너머로 끌려간 남편 앙드레 마리 고티에 드 몽주루는 그 먼 만토바까지 끌려가 결국 차가운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57세의 남편이 옥사하였을 때 엘렌 드 몽주루의 나이는 겨우 29세의 나이였다고 한다. 이제 인생을 살아온 지 30년도 안된 젊은 여성에게 삶은 너무나도 가혹하였다.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엘렌의 남편이었던 앙드레 마리 고티에 드 몽주루의 고귀한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그들이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상이 풍요로움으로 물들어가는 10월의 어느 날, 단두대에서 생을 마쳐버렸다. 왕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지 몇 주 후 프랑스로 도착한 엘렌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일군 재산을 지킬 새도 없이 여기저기 몰수당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론에 불과하였다. 왕비를 살리기 위해 외세와 손을 잡으려고 한 죄. 몽주루 가문은 시민들의 규탄과 고발 속에서 어느새 반드시 죽여야 할 역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전에 왕비가 올라 긴 싸움을 이어나간 혁명재판소에, 이제는 엘렌이 오르게 되었다.
엘렌 드 몽주루는 이젠 사랑하는 가족도, 재산도, 그리고 친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엘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음악, 음악만이 그의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혁명재판소에서 자신을 향한 분노를 쏫아내는 시민들은 만난다는 것은 젊은 여성에게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엘렌은 공화국의 가장 큰 죄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면시키기 위해 외세를 끌어드리려고 한 프랑스의 역모자로서 재판소에 오르게 되었다. 시민들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여자를 향해 야유하며 폭노 하였다.
엘렌은 이미 자신에게 가망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시민을 사랑한 프랑스의 왕비, 앙투아네트의 입에서 나온 억울한 항변조차 이들을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미 바스티유의 그 견고한 요새가 무너졌을 때부터 엘렌은 귀족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직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피가 프랑스의 땅에 뿌려져 새로운 발판으로 돋움 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삶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수많은 생각이 든 엘렌은 정신을 차리며 문득 인생에 남은 단 하나의 아쉬운 일이 생각나 마지막으로 재판관에게 단 하나의 자비를 요청하게 된다.
「일생의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습니다.」
라 마르세예즈.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조국 프랑스가 선택한 음악. 엘렌은 조심스럽게 위대한 행진곡, 라 마르세예즈를 건반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놈들의 더러운 피를 우리의 밭에다 뿌리자!
이 대목을 연주할 때 엘렌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 엘렌은 생의 마지막에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오롯이 연주에 집중할 뿐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연주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여한이 남지 않은 엘렌은 수면 위로 우레와 같은 갈채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관중은 엘렌의 피아노에 매료되었다. 군중들은 엘렌의 적에서 든든한 아군으로 변했다. 이렇게 엘렌은 자신의 음악으로 단두대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 재판소에서는 엘렌 드 몽주루에게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시민, 고티에 몽주루.
비겁한 오스트리아에 의해 남편이 살해되었으나 애국 행사를 위해 재능을 기부할 예술가.
엘렌의 놀라운 음악 재능은 새롭게 태어날 공화국에 필요하다 여긴 재판관은 엘렌에게 면죄부를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엘렌은 귀족이 아닌 시민으로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 엘렌이 혁명재판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단두대에서 목숨을 구하게 된 이야기는 19세기의 음악평론가 외젠 고티에 Eugène Gautier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로 혁명재판소의 기록부에 남아 있지 않아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실재성을 의심한다.
비록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지만 엘렌은 금방 일어섰다. 그가 가진 천부적인 음악의 재능만 있다면 어디든지 못 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평화로운 시절, 자신이 흔쾌히 받았던 사랑스러운 제자가 종종 활동하는 영국으로 향한 엘렌은 일련의 콘서트를 통해 다시 한번 시민으로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부를 취한 엘렌이 가장 먼저 취한 것은 바로 고단한 자신의 삶에 안위를 주는 일이었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농쉬 지역에 위치한 라 살 성Château de la Salle . 엘렌은 그 아름다운 라 살 성을 인수하여 자신의 안식처로 삼게 되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혼돈의 파리가 아닌 고즈넉하고 소박한 세농쉬의 자연은 엘렌의 지난 고통스러웠던 삶을 안정시켜주었다. 어느새 엘렌의 곁에는 한 남자가 함께 지켜주었고, 이윽고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났다. 눈이 시리게 밝게 빛나는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의 본명보다 에메 Aimé*라는 애칭을 더 즐겨 부른 엘렌은 다시 한번 생명의 은인인 피아노를 온전히 바라보며 탐구하기 시작했다.
*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이름
누구보다도 민감한 관찰력을 지닌 이 여성 피아니스트의 눈에 피아노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잠재력이 수많은 실이 되어 뻗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끝없이 뻗은 실 하나하나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지닌 실 하나하나를 오롯이 자신의 작품에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다시 한번 피아노의 가능성을 아마추어 연주자에게 해석해 줄 연습곡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오래 마음속에 두었던 악상을 다시 한번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외에도 엘렌은 소나타와 각종 악기들과 함께하는 피아노 작품, 그리고 여타 다른 형식의 음악들까지. 엘렌의 마음은 어느덧 과거의 고통으로 벗어나 음악과 함께하는 미래로 눈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날도 한창 피아노만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엘렌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문득 음악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 엘렌은 눈을 돌리자마자 방 한 편에 놓인 테이블에 어느덧 신문이 놓인 것을 발견하였다. 아마 연인이 기다리다 돌아가면서 한 편에 둔 신문일 것이다. 잠시 흐르는 땀을 식힐 겸 피아노에서 일어나 신문을 집어 든 엘렌은 신문을 읽다 문득 한 지점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저명한 6명의 하프시코드 교사를 뽑기 위한 경합』
바로 그 해 새롭게 시민들을 전문적으로 음악 교육을 시켜 외국의 음악에 휘둘리지 않는 프랑스만의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세워질 예정인 대학기관, 바로 '파리음악원'의 하프시코드 교사를 뽑기 위한 경합에 대한 공고였던 것이다. 엘렌은 신문에서 눈을 떼 뜨거운 태양 아래 노곤해진 나무들이 가득한 창 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하였다. 혼돈의 파리에 자신의 교수법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생겼음을, 엘렌은 깨달았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