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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Dec 02. 2022

V. 조용히 음악사를 움직인
그 여성의 에튀드

엘렌 드 몽주루 | 마지막 편

어느덧 중년이 된 크라머는 결코 자신과 비슷한 연배였던 그 스승을 한 번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작은 성의를 베풀면 언제나 큰 사랑으로 존중해주었던 스승은 젊은 날로부터 세월이 지나 한창 영글어가는 어느 날, 한 권의 악보집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크라머는 굳이 속을 들춰보지 않아도 이 악보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스승의 심오한 교수법에 감명받아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숨긴 채 선생에게 간절히 부탁한 그 요청에 대한 결과일 것이라. 존경하는 스승은 장장 인생의 20여 년을 바쳐 제자의 무모한 부탁을 잊지 않고 들어주었던 것이다.


크라머는 떨리는 마음으로 스승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피아노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이 새겨진 악보집의 첫 장을 펼쳤다. 방대한 악보집을 시작하는 첫 장엔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 적어나갔을 서문이 담겨있었다. 크라머는 앞으로 연습곡집 앞에 앉을 수많은 미래의 학생들을 위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 서문을 꾹꾹 눌러 적는 스승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취향을 망치지 않기 위해 음악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모든 음악을 무차별적으로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헨델의 음악은 음악과 과학의 조합에 가장 적합한 작품으로 귀하의 귀를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클레멘티, 크라머, 두세크의 작품 또한 이러한 이점을 제공하는 훌륭한 모델이 됩니다.  

엘렌 드 몽주루,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종합 과정’의 서문 중


 한 문장마다 음미하며 읽은 크라머는 자신이 언급된 문장을 읽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상하는 뜨거운 감정이 눈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존경하는 스승에게 이보다 큰 찬사가 어디 있을까. 젊은 시절, 선생이 레슨 시간마다 자신의 요청이 담긴 작품을 작곡하여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귀한 시간을 그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시절, 선대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엘렌 선생의 삼라만상을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아쉽다고 토로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스승은 항상 모차르트와 하이든이라는 두 천재를 찬양하곤 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한 선생은 직접 보여주겠다며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일부 차용하여 그만을 위한 손가락 훈련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곤 하였다. 이 천재들의 음악 또한 음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말과 함께.  


한참 악보를 넘기다 발견한 그 작품에 눈이 고정된 채 한참 바라본 크라머는 옛 시절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였다.

 

Hélène de Montgeroult: Etude No.36 in F Major | Clare Hammond ℗ 2022 BIS


No. 36. 노래와 어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도움말 : 피아노의 메카닉적인 완벽함은 평등한 연주로 구성된다. 나는 끊임없이 이 목표를 강조할 것이다.

엘렌 드 몽주루, 연습곡 제36번의 도움말 중에서




베르나르 샤레트 Bernard Sarrette는 한 권의 악보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감옥에 끌려가면서까지 힘겹게 세운 학교의 한 방에 앉은 채. 파리음악원의 설립자인 그는 설립 당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여성 교수를 기억한다. 그의 손에 쥐어진 악보는 바로 그 교수가 작곡한 피아노 연습곡이었다. 샤레트는 어떻게 이 교수를 잊을 수 있을까. 파리음악원의 피아노 학과를 이끌어갈 대중적인 교육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여성을 사임시켰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제 파리음악원은 그 여성을 쫓아내고 누구나 만족할만한 대중적인 교육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후임으로 들어온 장 루이 아담의 헌신으로 파리음악원의 피아노 학과는 체계가 잡히며 성장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여성을 해임시키고 장 루이 아담을 후임으로 부른 것은 파리음악원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레트는 오늘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그 여성의 연습곡집에 담긴 오밀조밀하고 정교한 교육법에 사로잡혀버렸다. 염치가 없지만 이 훌륭한 교육법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재 등장한 모든 연습곡 중 이만큼 체계적이고 세밀한 연습곡이 어디 있을까. 샤레트는 한참 고민하다 이내 결심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음악원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음악 교재는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비공식적이라도 이 연습곡집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적용시키겠다는 결심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엘렌 드 몽주루의 연습곡집은 각 작품마다 <도움말 Observations>을 붙여 학생들에게 작품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아버지의 제자로 들어온 17살의 청년과 함께하며 피아노의 은밀한 비밀에 빠져든 8살의 소녀는 어느새 18살의 어른이 되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미 유럽 전역에서 가장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 여성은 미래를 약속한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딸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아버지의 손에 들렸던 그 연습곡을 펼친 채 말이다. 어느 순간 딸의 마음 한편에 각인된 그 연습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연주를 펼치는 여성을 향한 애정과 동경이 가득하였다.


세상을 놀라게 한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와 아직 무명의 음악가였던 로베르트 슈만은 항상 이 연습곡이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에 존재할 환상의 세계에서 온 작품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오래전에 작곡된 연습곡인데도 여기에 담긴 이 음악가의 교수법이 구식이기는커녕 오늘날에도 가장 유익하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에 가장 중요한 미덕인 '내면의 감정'이 이렇게 풍부하게 담겨있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연주할 때마다 드러나는 음악의 순수함이 오롯이 담겨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음악가는 분명 이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 작품을 듣고 형식과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 전시대의 작품이라 생각할까. 이 연습곡집은 그야말로 완벽한 오늘날 낭만주의의 작품이 틀림없다고 클라라와 슈만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이와 어린 시절부터 나눈 추억의 음악을 공유하였다.


Hélène de Montgeroult Etude No. 112: I. Adagio non troppo | Nicolas Stavy ℗ HORTUS


No.112. 늘임표에 대하여
도움말 : 늘임표는 리듬의 정지이자 휴식이며, 작품의 성격과 특성에 관련되어 준비하는 것이 목표다.

엘렌 드 몽주루, 연습곡 제112번의 도움말 중에서




어느덧 음악의 도움으로 단두대로부터 목숨을 건진 엘렌 드 몽주루라는 여성의 작품들을 하나둘씩 세상에서 잊히게 되었다. 이 연습곡집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 간다는 것은 진정 우리의 음악사에 큰 손실이 아니지 않을까,라고 초로의 남성은 책상 앞에 앉아 생각하였다. 앙투안 프랑수아 마르몽텔 Antoine-François Marmontel. 30대에 처음으로 파리음악원에 들어와 노경에 접어들기까지 파리음악원에서 훌륭한 교육자로 거듭난 이 인물의 손에는 오랫동안 사용하여 너덜너덜해진 낡은 책이 한 권 쥐어져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 파리음악원 최고의 저명한 교육자’라는 자리에 앉혀준 것은 바로 어린 시절에 연습한 이 낡은 연습곡집 덕분이었다고 마르몽텔은 생각하였다. 그가 가진 신선한 상상력, 풍부한 표현력, 그리고 손 끝에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탁월한 기교력은 전부 이 3권의 방대한 연습곡집을 통해 만발하였기에 오늘날의 '앙투안 프랑수아 마르몽텔'이라는 예술가가 존재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얗게 머리가 센 스승은 자신을 거쳐 장차 프랑스의 음악을 이끌어 나갈 자랑스러운 젊은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자신의 이 모든 재능은 700 페이지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연습곡집에서 꽃 피웠다는 것을. 스승은 종종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항상 자신을 피아노 앞에 서게 해 준 고마운 연습곡집을 추억하곤 하였다. 제자들은 이제 구식이 된 그 연습곡집에 담긴 교수법에 의문을 가질 때마다 마르몽텔은 이 심오한 연습곡집이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지워져 가는 것에 탄식하곤 하였다.


「내가 50여 년 전, 피아노에 건반을 처음 올렸을 때 함께한 교수법은 바로 몽주루 부인의 교수법이었었네. 작곡된 날짜만 본다면 이론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완전히 구식이라 믿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한 때 파리음악원의 비공식적인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젠 그 음악원에서도 존재가 잊힌 교재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르몽텔은 어떻게 해서든 이 연습곡집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던 나머지 그는 급기야 자신이 창조한 수많은 저서 중 한 권에 엘렌 드 몽주루의 연습곡집에 대한 한 구절을 남기게 된다.


엘렌 드 몽주루가 제시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전체 과정'은 좋은 연주의 토대를 이루는 많은 메커니즘 공식과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현된 진보를 응축했으며 장식과 풍미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소리, 풍미가 가득한 음색, 표정 등을 다루는 특별한 챕터는 그 어느 교재보다 꼼꼼하게 작성되어 제자뿐만 아니라 스승이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훌륭한 기반을 제공한다.


앙투안 프랑수아 마르몽텔 저서, '초상과 원형 장식 : 유명한 피아니스트들 Silhouettes et Médaillons : Les Pianistes célèbres' 중에서


제자들은 사랑하는 스승이 극찬한 그 교재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최고의 음악 교수 마르몽텔의 밑에서 배움을 청한 파리음악원의 학생들은 스승이 사랑한 연습곡집을 종종 연주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스승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 연습곡집이 세상에 잊히지 않길 바라는 스승의 소원대로 엘렌의 연습곡집은 그렇게 제자들의 마음속 한 편에 스며들어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프랑스를 음악의 중심지로 이끌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훗날 파리음악원과 대등한 고등 음악 교육기관인 스콜라 칸토룸 Schola Cantorum를 창설한 뱅상 당디 Vincent d'Indy. 피아노의 대가로 불리며 훗날 알프레도 코르토 Alfred Cortot라는 20세기의 거장을 탄생시킨 루이 디에메 Louis Diémer.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본질은 피아노에 있었던 조르주 비제 Georges Bizet. 그리고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의 마음엔 마르몽텔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프랑스의 음악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 푸근한 나무를 키워준 엘렌 드 몽주루라는 이름의 양분은, 세상을 이끈 음악가들의 마음 한 편에 각인되고 어느 날 문득 조용히 되살아나 은밀하게 서양 고전 음악사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끝>


엘렌 드 몽주루 Hélène de Montgeroult (1764.3.2~1836.5.20)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프랑스 Wikipedia France

피아니스트 미칼 탈의 블로그 Michal Tal's Blog

일루미네이트-여성의 음악 Illuminate-Women's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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