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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Feb 14. 2023

나의 추억은 음악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된다.

음악을 만나 비로소 피어나는 추억 #.01 

Adolf Jensen | Wanderbilder, Op.17 No.3 Die Mühle




나는 타인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안 한다. 딱하고 가여웠던 유년의 추억을 이야기하기엔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이고, 지나왔던 일상을 추억하기엔 특별했던 추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주변인들의 말을 경청할 뿐이다. 


평범.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는 정의를 가진 이 단어는 그야말로 내 인생을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나는 일탈 없이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왕복하였고, 여섯 살 때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이래로 피아노에 전념했을 뿐이다. 공부가 좋아 그 흔한 땡땡이 한 번 쳐본 적도 없고, 입시 준비를 위해 추운 겨울날, 덜덜 떨어가며 하루에 13시간씩 피아노에 손을 올려 몇 번이고 손톱을 부러뜨렸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교에서 으레 어른이 된 증표로 마시는 술. 그 술조차 싫어해 그 흔한 회식에 참여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술 한 모금조차 입에 댄 적이 한 번도 없어 아직도 자신의 주량조차 모르는 삶. 그야말로 네모반듯한 삶, 내 삶은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삶에서 가장 특별했던 날은 언제인가?'. 

집과 학교, 혹은 집과 회사만 오가며, 책을 읽고 음반만 듣는 내가 답하기 가장 곤란한 질문이 바로 이 질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한 해가 네모반듯한 서류뭉치처럼 인생 한편에 쌓이며 2023년이라는 새해가 찾아왔다. 


새해를 맞이하여 동생과 함께 방을 대청소하였다. 이제는 오래돼 제 기능을 못하는 가구들을 싹 버리고 벽지를 직접 다시 바르며 새 가구들을 열심히 조립하였다. 오래된 책장을 버리기 위해 켜켜이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낼 때였다. 이제는 노랗게 변색되어 세월의 냄새를 품은 어린 시절의 악보집들이 함께 튀어나왔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동요들을 모아둔 반주집, 학원 연주회를 준비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들이 담긴 피아노 명곡집, 에드나 메 버넘 Edna mae burnam이 작곡한 테크닉집 '매일 12곡 A Dozen a Day' 시리즈, 그리고 항상 빠질 수 없는 영원한 바이엘까지. 


그리운 악보집들이 쏟아져 나오며 방을 함께 정리하던 중이었던 동생과 뜻밖의 추억을 나누게 되었다. 




우리 자매에게 바이엘은 특별한 추억이 하나 스며 있다. 같은 예체능을 전공하였지만 음악을 진로로 삼은 나랑 다르게 미술을 자신의 진로로 삼은 우리 동생도 어린 시절엔 나와 함께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바로 초견으로 미리 예습까지 준비하는 나와 다르게 동생은 악보에 표기된 가온도를 건반에서 찾기 힘들어할 정도로 피아노를 어려워하였다. 


하지만 음악에 큰 재능이 있든 없든 보통의 학생이라면 으레 참가해야 하는 관문이 있으니 연주회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바이엘을 연주했던 동생 또한 연주회 참여가 결정됨에 따라 열심히 선생님이 지정해 주신 레퍼토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연주했던 곡이 바이엘에 수록된 '물레방아 Die Mühle'라는 작품이었다. 페르디난트 바이어 Ferdinand Beyer가 작곡한 '바이엘'─사실 바이엘이 아닌 '바이어'가 옳은 표현이다. 아마 당시 '바이어'에 대한 일본의 표기법인 '바이에르 バイエル'를 그대로 수입해 오늘날 이 명칭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 정확한 원명으로 '피아노 연주의 입문 Vorschule im Klavierspiel op. 101'이라는 작품은 현재도 많은 국가에서 피아노 교칙본으로 자주 활용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에 출판되는 바이엘은 바이어가 작곡한 원곡에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도 함께 수록하여 원곡을 보강한 판본이라고 한다. 동생의 레퍼토리로 선정된 '물레방아' 또한 바이어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곡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슈만의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인연이 이어지지 못한 음악가, 아돌프 옌젠 Adolf Jensen이 바로 이 작품의 작곡가였다. 


우리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한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기억하는 머릿속의 '물레방아' 악보를 끄집어 허공을 향해 두 손으로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 무채색 추억은 다채로운 빛깔에 물들기 시작하였다.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추억의 뒤편에 숨겨진 감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을 따로 움직이지 못해 버벅거리던 동생, 옆에서 지켜보면서 답답해하며 가르쳐주던 나. 

그렇게 어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회 당일, 끝까지 더듬더듬 완주하여 청중들의 박수를 받는 동생.

그리고 어려워했던 레퍼토리로 인해 피아노에 흥미를 잃어, 더 이상 피아노 학원에서 동생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던 나.


그렇게, 동생이 연주회를 위해 연습한 어려운 레퍼토리에 고생 꽤나 했던 하나의 '사건'에 음악을 만나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추억'으로 다시 숨 쉬게 되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유년부터 피아노와 함께 한 나의 모든 추억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 함께한 음악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는 것을. 




새해에 겪은 이 특별한 경험은 바쁜 삶에 어느새 잊어버렸던 이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게 소중한 경험을 가슴에 담은 채 이후 나는 다시 그리운 음악들을 전공자나 리뷰어의 관점이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해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음악 속에 숨겨진 추억을 탐색해 가며, 나의 평범한 인생은 다채로운 색상을 머금어 특별한 인생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나의 추억은 음악을 만나 비로소 오롯이 다채로운 꽃으로 피어났다. 

나의 추억은 음악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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