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차 대전의 뫼즈강
유럽의 화약고
황태자 내외는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은 유럽 정가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 일은 오스트리아 국내에선 큰 공분을 일으키지 못했다. 황태자의 국민적 인기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황태자 내외의 피살 소식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들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엔나커피를 음미하며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 현장인 보스니아에선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노골적으로 세르비아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 암살범이 세르비아계 청년들이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 5천 여 명의 세르비아인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사형을 받거나 교도소에서 죽었다. 작은 싸움은 큰 싸움으로 변해갔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더했다. 황태자 암살범들이 세르비아인들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부와는 직접 상관없었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대들만큼 그들은 힘을 갖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참에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원했다. 기왕 차린 잔치 상이니 숟가락 여러 개를 얹어 잔뜩 배를 채우려 했다.
오스트리아의 탐욕은 러시아를 질색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 오스트리아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이번엔 독일이 반응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였다. 결국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 민족으로 일이 확대됐다.
위험한 징조였다. 가장 불붙기 쉬운 것이 종교적 대립이다. 특히 일신교끼리의 충돌은 자칫 큰 전쟁으로 비화되기 쉽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종교는 모두 일신교(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와 이슬람)였다.
그 다음이 이질적 민족 간의 다툼이다. 게르만과 슬라브 민족은 기질 자체가 다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한 뿌리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다. 러시아는 슬라브주의를 앞세워 은근 발칸반도의 좌장임을 확인하려 들었다.
동원령에 동원령으로 맞대응했고, 급기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내렸다. 유럽 제국들은 근질근질하던 차에 마치 이런 일을 기다리기나 하듯 전쟁 예비 단계까지 험악한 분위기를 몰고 갔다.
독일은 러시아를 겁박했으나 서쪽의 프랑스가 염려됐다. 두 강대국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체력적 부담이 컸다. 두 개의 전선이 동시에 펼쳐지면 군사력을 50-50으로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면 판을 그르치게 된다. 비스마르크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했다.
독일에겐 이런 경우를 대비해 미리 준비된 매뉴얼이 있었다. 전 독일 제국 총사령관 알프레드 슐리펜이 고안한 전술이었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독일은 개전 초기 모든 화력을 프랑스에 집중시킨다.
외교와 군사, 지정학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두루 감안한 복잡한 계산 끝에 나온 전략이었다. 넓은 땅을 가진 러시아는 군사를 모으려면 최소 두 달 가량 걸린다. 독일은 그 기간에 빠른 속도로 파리까지 치고 들어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다.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에선 최대한 지연전술로 시간을 번다.
일단 프랑스를 쳐서 이긴 다음 러시아를 상대한다. 가까운 적에 전력을 집중한 후 멀리 있는 적마저 물리친다는 1+1 전략이었다.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기엔 너무 체력 소모가 컸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최대 패권국으로 군림한 미국조차 결국 포기한 전략이다.
미국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은 2021년 8월 말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지막 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이 20년간 주둔했던 이곳에서 발을 빼자 전 세계는 물론 미국 내 여론도 비판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이어 미국의 또 하나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라는 비난이었다.
그러나 대 중국 압박에 주력해야 하는 미국으로선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쏟아 부을 수 없었다. 미국은 20년간 아프간에 2조 330억 달러(약 2650조 원)를 투입했다. 그러고도 빈손으로 쫓겨나야 했다. 대신 축척된 힘을 중국 견제로 돌리겠다는 의도였다.
패권국 미국은 200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벌여서 모두 이긴다는 소위 ‘윈윈 전략’을 추구했다. 구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한 후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의 자신감이었다.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이 합참의장으로 있으면서 이를 주도했다.
당시 미국은 걸프만과 한반도를 두 개의 전쟁 핵심지역으로 분류했다. 걸프만은 석유수송과 이스라엘의 안보에 직결되어 있었다.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전략적 보루다. 이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모두 승리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윈윈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국방비가 들기 때문이다. 2개 지역 동시 전쟁 원칙을 포기하는 대신 한 곳에만 집중하되 나머지 지역의 전쟁을 되도록 억제한다는 소위 ‘원 플러스’ 전략으로 대체했다.
독일은 먼저 약한 고리부터 건드렸다. 러시아나 프랑스가 아닌 훨씬 작은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