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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24.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71

3. 1차 대전의 뫼즈 강

개전 초기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마침내 전쟁이 개시됐다. 독일은 재빨리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후엔 프랑스에도 전쟁 발발을 선언했다. 불길은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독일 수뇌부는 프랑스 침공 루트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중립국 벨기에를 거쳐 들어가면 시간을 줄일 수 있으나 영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초반 영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면 힘에 부친다. 전선이 너무 넓어진다. 


고심 끝에 결국 독일은 8월 4일 벨기에 침공을 개시했다. 벨기에는 프랑스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던 이른바 왜의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연상시킨다. 


개전 초기엔 독일의 펀치가 잘 먹혔다. 프랑스 수도 파리의 턱 밑까지 치고 들어갔고, 동부전선서도 무난히 러시아 군의 발목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슐리펜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영국이 참전하면서 독일의 주먹은 급격히 적중률을 잃기 시작했다. 


더구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전력이 예상보다 형편없었다. 서부전선은 서서히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서부에서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낸 후 러시아를 부순다는 계획은 꼬이기 시작했다. 슐리펜의 후임 몰트케 사령관은 서부로의 집중을 포기하고 동부전선으로도 군대를 이동시켰다. 전략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전략적 실수는 프랑스 쪽에도 있었다. 군사력 면에서 프랑스의 위대했던 전성기는 나폴레옹 시절이었다. 나폴레옹 전술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점돌파(一點突破)다. 나폴레옹은 수비보다 공격을 우선했다. 현대축구로 비유하면 ‘닥공(닥치고 공격)’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적보다 한 발 빨리 움직였고, 상대의 가장 약한 고리에 전력을 집중시켜 전체를 무너뜨렸다. 1796년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투서 27살의 청년 사령관 나폴레옹은 ‘닥공’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두 국가 연합군의 약점은 양군의 연결고리 지점이었다. 이쪽의 명령도, 저쪽의 지휘도 미치지 않는 어정쩡한 지점을 노리고 돌격해 들어갔다. 허를 찔린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폴레옹이 즐겨 읽었다는 ‘손자병법’에는 “다수의 적으로 소수의 적을 치면 승리한다. 아군의 공격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적은 흩어진다(허실편)”고 되어 있다. 


손자는 이를 위해 “바람 같이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전투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적을 끌고 다녀야지 적에게 끌려 다녀서는 이로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만큼 이를 잘 활용한 전략가는 드물다. 나폴레옹은 ‘손자병법’ 번역본을 항상 베개 밑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나폴레옹의 전술에 수정을 가한 것은 1차 대전 때였다. 독일의 공격에 공격으로 맞받아친 프랑스군은 상대의 기관총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프랑스는 공격에서 수비로 전략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참호다. 상대의 기관총을 피하려면 참호를 깊게 파고 몸을 숨겨야 했다. 프랑스 수비전략의 결정판이 ‘마지노선’이다. 이른바 침대 축구다. 맞서 싸우기보다 질질 시간을 끌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사상자는 늘어났다. 


나중에 프랑스는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독일과의 국경에 급히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1차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깊이, 더 튼튼히 참호를 팠다. 그 안에는 전기와 물, 식량은 물론 여가시설까지 갖추었다. 


이는 프랑스의 또 다른 오판이었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과 전혀 양상이 달랐다. 전차와 전투기로 기동성이 향상돼 마지노선의 느리고 견고한 방어막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고립주의 영국의 가세로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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