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이라고는 하지만
"아빠, 몇 시에 집에 도착해?"
"글쎄, 일 마치고 뭐 좀 할 게 있어서, 그래도 7시 반이면 도착할 거야. 왜?"
"흑백요리사 보려고 그래. 시간 맞춰 오셔"
요즘 우리 가족은 넷플의 <흑백요리사>에 완전히 빠졌다. 일반적인 대결구도를 뛰어넘는 요리 실력 겨루기, 엄청난 경력과 포스를 지닌 세프의 등장, 가장 놀라운 일은 현장의 분위기를 수십 배 압축한 긴장감 넘치는 편집이다.
지난 24일 3회분을 추가로 공개했지만 식구들과 함께 보려고 아껴두고 있었다. 난 점심시간에는 직원들에게 스포를 당하지 않게 조심한다. 요리 이야기는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
집에 도착해서 씻기부터 하려니 딸이 '욕실에서 나오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게'하고 운을 띄웠다. 난 <흑백요리사> 이야기겠지 하고 생각하며 거실에 앉았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딸은 낮에 성우학원 스터디를 마치고 면접을 봤다고 한다. 서면에 있는 콜센터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3일간 하루종일 교육을 받고 목요일부터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하루 4시간 정도 민원응대 업무를 하지만 4대 보험을 약속받는 정규직이다.
왜 갑자기? 물어봤다. 딸은 대학교 중퇴 후, 집에서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일, 성우학원 다니면서 스터디그룹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사회 경험이 없다. 딸은 착한 편이다. 성우 학원 강사님이 '너 욕 안 해봤지?'라고 캐물었단다. 강사님은 <글로리>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극한의 감정까지 끌어올리는 훈련을 하라고 충고했다. 자기도 사회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면접과 콜센터 업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딸은 소심해지기도 하고 두려움도 살짝 내비쳤다. 동시에 직장 생활에 대한 설렘과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묻어났다. 나는 티 나지 않게 내가 줄 수 있는 격려의 말을 보탰다.
"하루 4시간이니 아르바이트라고 해야 되겠지?"
"아니지. 계약서에 정규직이라고 되어 있으면, 콜센터 정식직원인거지. 대단하다. 첫 직장이 정규직이라니"
딸은 월급 받으면 모든 금액을 엄마, 아빠에게 선물하겠으니 미리 생각을 해 두라고 했다. '엄마, 아빠 50만 원으로 살 것 생각해 둬', '첫 월급 받으면 너 자신을 위해서 써야 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딸이 말하길, 원래 월급은 엄마, 아빠를 위해서 쓰는 거란다. 그래야 잘 된다면서.
"말 안 하면 50만 원어치 내복 사 줄 거야"
한 달 100만 원, 딸에게는 천금 같은 돈이다. 뭘 사달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