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오피스텔에 쌀은 있어?”
“요즘 누가 밥해 먹노?”
아내가 핀잔주듯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아들은 즉석밥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아들은 밥을 짓지 않고 대기업에서 만든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이제 밥솥보다는 전자레인지가 더 필수품이 되었다. 밥때가 되면 코끝을 감싸는 촉촉하고 묽은 소나무 향 대신, 위 잉 윙 전자파가 발사되는 소리가 부엌을 채운다. 소리가 냄새를 잡아먹었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제자리 돌기를 하고 나온 즉석밥의 향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하늘거리다가 툭 떨어진다
아들이 사는 곳에 쌀도, 쌀통도, 밥솥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나와는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사용하는 물건도 달랐다. 아들은 대기업의 즉석밥 제품을 이용하면서 자본주의 맛과 편리함을 얻게 되었지만 잃어버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밥 짓는 냄새다.
왕겨(쌀 껍데기)를 벗은 쌀 알갱이는 끓는 물과 만나 익어가면서 육체는 밥이 되고 영혼은 날려 보낸다. 밥솥 뚜껑 밑에 모인 영혼의 무리는 압력밥솥의 추가 도는 순간, 일제히 밖으로 터져 나온다. 쌀 알갱이가 밥알이 되면서 빠져나온 영혼, 즉 향기는 처음에는 밥솥의 압력을 받아 로켓이 발사되듯이 공기 중으로 폭발한다. 추진력이 떨어지면 수증기의 힘을 빌려 퍼져나가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힘으로 공중을 떠다닌다.
냄새와 맛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프루스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인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을 보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내게는 밥 짓는 냄새가 그렇다. 밥솥의 추가 뱅글뱅글 돌면서 쉬익 쉬익 가쁘고 거친 숨을 뿜어내면 밥 익는 냄새는 나의 뇌세포를 자극한다. 나의 감성과 기억은 어릴 적 뛰어놀던 옛 마을로 나를 이끈다.
서부 경남에 자리 잡은 내 고향 마을의 이름은 ‘와요리(里)’다. 동네 이름은 어릴 적 우스갯소리 단골 메뉴였다. 학기가 시작되는 교실에서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와요리에 사는 학생의 흔한 대화다.
“니 어디 사노?”
“와요”
“와요?”
마을 이름인 ‘와요’는 ‘왜요?’라는 말의 경상도 말이다. 억양만 다를 뿐이다. 우리 마을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고작 여섯 집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북쪽으로 1㎞ 정도 위로 올라가면 대략 오십 채가 넘는 큰 마을이 있었다. 500m 정도 아래쪽에도 비슷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 아랫마을은 마을 뒤에 있는 산이 초가집과 몇 채의 기와집을 안고 있는 모양새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다. 우리 집 마루에 서면 아랫마을 전체가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아랫마을 이름은 ‘미실’이다. 와요리와 미실은 집성촌이다. 이웃집의 밥그릇 개수를 헤아릴 정도로 서로 정이 넘치는 마을이었다. 그 많았던 할배와 할매, 아재와 아지매, 동무들은 돌아가시거나 마을을 떠났다. 지금은 노인 몇 분만 살고 계신다.
‘냄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저녁 무렵 아랫마을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밥 짓는 냄새다.
“밥 무로 안 들어오나?” 해가 서쪽 산에 걸리면,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어머니의 불호령에 집으로 쫓기듯이 들어간다. 어머니는 수수로 만든 방 빗자루로 내 몸의 먼지를 탈탈 턴다. 어머니가 빗질할 때마다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건지, 빗자루로 두들겨 패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손발을 씻고 툇마루에 서서 ‘미실’ 동네를 내려 보면 어린 나이에도 가슴에 가득 차는 평화와 여유로움을 나는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풍경이라는 것의 정체는 밥 짓는 냄새였다. 그때는 모든 집이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하던 시절이었다. 초가와 기와, 슬레이트를 구별하지 않고 둥실둥실 떠오른 나무 연기는 멀리 가지 않고 지붕 위에 하얀 띠구름을 만들어 서성인다. 아랫마을을 감싸고 있는 흰 구름에서 나는 향은 내 코를 간지럽힌다. 나무 타는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밥물 끓어오르는 뜨거운 물 냄새다. 밥 익는 달콤한 냄새다. 마지막 냄새가 가장 치명적이다. 밥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 냄새다. 고소함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솥에 물을 부어 숭늉을 만들 것이다. 아궁이에는 아직 불이 남았다.
밥 짓는 냄새를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은 ‘밥’ 그 자체, ‘밥이 우리 삶에 주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밥을 ‘짓는 것’은 집을 짓고, 옷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행위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와 통화할 때도 밥 이야기를 하면서 안부를 여쭤본다.
아버지 식사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