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WOKE라는 단어는 워크는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경계"를 의미하는 형용사로 (직역으로 "깨어있는"이라는 뜻) 영미권, 특히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원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투리 (AAVE)에서 파생되었다. 2010년대부터 인종차별, 성차별, LGBT 인권 부정 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포괄하게 되었으며 또한 미국의 백인 특권과 노예 배상안과 같은 정체성 정치 및 사회 정의와 관련된 미국 좌파의 일부 아이디어에 대한 약어로 사용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인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인종 차별은 아직 한국에서 부각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LGBT 인권이나 여성 인권 등의 담론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른바 ‘페미’들과 ‘한남’들 간의 갈등에 의해 부정적인 분위기를 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WOKE 문화는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모방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여 토착화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워크 운동자들이 대체로 스스로가 좌파라고 자처하는 바람에 오늘날 한국의 진보 진영은(물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상당히 위축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아무리 한국이 보수적인 국가라고 해도 그렇지, 좌파 정치집단에서 왜 이토록 혐오받고 또 그 자신도 남들을 혐오하는 워크 문화가 나오게 된 걸까?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좌파로서 절대로 자신의 자리를 워크들에게 내주지 않겠노라고. 첫 장에서 명확히 밝히듯이, 이 책의 논점은 좌파적이라고 간주되는 현대의 목소리들이 모든 좌파적 입장에서 핵심이 되는 철학적 사상, 즉 『부족주의를 극복하여,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정의와 권력을 확고히 구별하고, 진보의 가능성을 믿는 것 등』을 '어떻게 폐기해 버렸는지'에 관한 것이다.
워크는 단순히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경계하는 태도가 아니다. 작가에 따르면 워크는 주변화된 개인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출발점으로 삼으며, 주변화를 낳은 여러 정체성으로 개개인 모두를 분해하고 환원해 버린다. 교차성이라는 개념은 본래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여러 정체성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하게 주변화된 부분에만 초점을 두며, 계속해서 키워나간 후 결국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의 숲으로 불려버린다.
이러한 활동을 우리는 정체성 정치라고 하는데, 본래 차별받았던 원인이자 나중에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가 기억해야 할 흉터 진 정체성이 오늘날에는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현상이다. (최근까지 낙인으로 여겨진 것이 이제는 지위 상승의 원천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의미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자신이 워크 문화에서 다뤄지는 약자라고 가짜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의 기부금을 사기극으로 가져가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한국에서도 악랄한 범죄자라도 워크 사상에서 규정한 사회적 소수자로 밝혀지는 순간, 옹호받아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성은 응분의 보상을 주장할 정당성의 원천이 되어야 하지만, 피해자성 자체를 마치 화폐처럼 당연히 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여기기 시작하면 인정과 정당성은 미덕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 (p.39)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성을 이기고 넘어선 것에 자부심을 가지지, 피해자성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자를 동등한 위치에서 공감하는 것이 아닌 동정을 유도함으로써 이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보려는 정치적 계산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들은 순교자들인가? 그들은 어떠한 명목을 위하여 억압과 고통을 당하였나? 순교자들에게는 내세의 보상과 신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희생양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성녀, 성자가 아닌 이상은 피해를 받고 고통받는 것은 자기의 의지는 아닐뿐더러 그로 인한 보상 또한 사실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순교와 고통은 새로운 면죄부가 되어 우리를 타락시킨다. 종교개혁 때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정책 때문에 회개의 개념 자체가 오염되었다면, 세속의 시대에는 박해받는 이유가 아닌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구원될 것이라는 지극히 율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학적인 광신에 빠지게 한다.
결국 정체성 정치는 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부족주의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들 종족과 나머지 모든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인간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내란 상태가 야기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정체성 정치는 궁극적으로 과거에 뿌리를 박고자 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그 자리에 묶어놓을 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토드 기틀린은 정체성 정치가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힘은 있지만, 그 근저에는 무력함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것이 은폐될 때가 아주 많다고 한다. 정체성 정치는 자잘한 일에서 오는 짜증을 역사를 바위는 웅대한 열정인양 혼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목표를 내거는 이들에게 정치적 수사라고 조롱을 퍼붓기 일쑤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워크 문화가 보편주의를 비난한다고 말한다. 워크 문화 안에서 보편성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나는 이유는 워크 문화가 특수한 시대와 장소와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인 지배적 문화를 추상적 인간의 이름을 내걸고서 다른 문화에 강요하는 가짜 보편주의와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크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보편주의는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파시즘과 식민주의와 독재정을 비난하는 근거가 된다. 다만 계몽주의는 식민주의를 오히려 비판했으나 19세기 식민주의 정치가들은 이들은 왜곡하여 식민주의의 합리화를 위해 인간이 아닌 이들을 인간으로 '계몽'시킨다는 사상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일 뿐이다. 워크들이 말하는 ‘인권’이라는 개념의 시작도 사실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계몽주의에서는 인권의 신성성은 이성과 공감에 의한 보편성에 따르는 동시에 서구 기독교적인 철학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다. 곧 인간은 존엄할 권리를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몽주의가 신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믿는 바람에 계몽은 세속의 시녀가 되었다고 인식했다.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신뢰를 끊어버리기에 충분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남겨놓았던 계몽의 희망은 왜곡과 오독으로 인해 사라졌다.
20세기 후반부터 우리 사회를 점령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처럼 인간의 이성을 부정해 놓고 인간 본성을 끝없는 경쟁의 순환고리에 묶인 것으로 보는 신자유주의처럼 비이성주의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도 없다고 선언하는 이론의 종말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워크 사상의 뿌리가 된다. 그들은 인권을 주장하면서 인간성을 거부하였고, 이상을 외쳤으나 실제로 추구했던 것은 정체성을 이용해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등의 현실적 가치였다. 진보에 대한 희망을 꺾어버린 제2, 제3의 요한계시록들, 그러나 그들은 종교이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작가는 포스트모던이 망쳐놓은 우리의 통념을 되돌린다. 이상의 가치는 현실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는가로 측정되지 않는다. 거꾸로 현실은 이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로 판단된다. 이성의 임무는 경험에서 나온 주장들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경험이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이상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경험의 지평을 넓히도록 우리를 추종하는 것이다. 워크 문화처럼 자의적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일단 좌파도 아니고, 워크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우파인 것도 아니다. 애초에 나는 정치적 입장을 아직 뚜렷하게 정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워크 사상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듯한 거짓 속에 편협함을 감추는 상태로 우리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작정 워크 문화를 비난하거나, 얼떨결에, 혹은 감정적으로 옹호해서는 안 된다. 결국 워크 문화와 극우주의가 만들어내는 폐해를 잘라내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진보의 희망을 놓지 않고 서로를 나누는 감정의 말뚝을 뽑아내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