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톨스토이) 리뷰
죽음이라는 법정에서 승소하는 방법
여기에 고인 이반 일리치의 일생을 읊어보도록 하겠다. 그는 고등법원 판사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출세가도를 달렸던 고위 공무원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어릴 적부터 능력있고 사교적이며 자기 일에 철저하여 집안의 자랑거리라고 불렸다. 그의 사교성 덕분에 이반은 사교계 최상층에게 인생관을 배우게 되었다. 법률 학교 재학 시절에 못된 짓도 한 적이 있지만 높으신 분들도 다 그런 짓을 해도 신경을 안 쓰니 그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프랑스어 단어들로 도배되며 묘사되는 그의 인생은 화려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내가 첫 아기를 임신한 후로부터 아내의 짜증과 바가지가 늘어났다. 이반은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호 생활의 기본적인 혜택에만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가족생활을 최소화하고 일에만 최대한 집중함으로써 일터에서만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그러던 결혼 생활 11년째, 다른 이가 이반 일리치가 노리던 재판장 자리를 차지하자 이반은 이 처지가 잔인하고 부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변 사람 중 아무도 그의 여유로운 생활에 이런 일이 그토록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가 상대보다 두 배 높은 지위를 잡을 때까지 심란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이반 일리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재판장이 되었고 남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함에 흡족해했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반 일리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심각하냐고 거듭 묻는 이반의 말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의사의 권위적인 태도는 마치 이반 일리치가 법정에서 피고를 대하는 태도와 같았다. 이반 일리치는 고위 판사로서 얻을 수 있는 전능감을 추구하고 그것에 심취해 있었으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가족사는 도외시하고 있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죽음이라는 운명의 심판은 자신의 법정에서처럼 권위로 이겨낼 수도 없었고, 가족사처럼 피할 수도 없었다. 마침내 이반 일리치는 난생 처음으로 무기력함을 느꼈다.
병환이 심각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했고 두려움에 빠졌다. 그는 학창시절에서나 배운 삼단 논법의 예처럼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죽는다.'와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 앞에서 나약해진 이반을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 격하시켰다. 불쾌한 일. 사람들은 최대한 그의 앞에서 죽음에 대한 말을 아끼고 살 수 있을 것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이러한 거짓이 이반 일리치가 평생토록 지키려던 품위였다.
게라심이라는 종이 이반 일리치를 간호하게 되었을 때, 이반 일리치는 그제서야 게라심에게서 인간적인 위로를 받는다.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를 비록 주인의 입장이라 할지라도 불쌍히 여겼고 그가 편안해지기를 바랬다. 이반 일리치는 위로받고 싶었고 누군가 자신의 처지를 같이 슬퍼해주기를 바랬다는 사실을 게라심을 통해 알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이반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과거 그가 그토록 원하고 만족하던 삶은 편안하고 행복했는가?사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재판과도 같아 죽음이라는 판결을 피할 수 없도록 그를 옭아메고 있었다. 인생은 이토록 무의미한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저출산과 자살로 말라비틀어져 가는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반 일리치는 귀족의 자제인데다가 판사이지만 한국 사회는 인간으로 비유하면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봉건적인 귀족주의가 현대 한국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19세기 러시아 상류층의 인생관 대신 한국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능력주의와 약육강식이라는 인생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놀랍도록 이반 일리치의 인생관과 공통된 점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누구보다 강해지면 그 어떤 위험도 자신을 덮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출세지향주의 같은 생각들처럼 말이다. 또한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월감과 전능감을 가지고 싶게 유혹한다. 먹히기 싫다면 먹으면 된다. 밟히기 싫다면 밟으면 된다. 타인은 너의 식량이고 노예일뿐, 능력만 있으면 네가 법이고 네가 세상이다.
자극적인 복수극 장르가 유행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가 재판장이었듯이 상대방의 운명을 좌우하는 심판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다가 만일 자기 자신에게 죽음의 위기가 찾아온다면 과학의 힘을 빌려 죽음마저도 재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막는 것은 노화일 뿐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한국은 죽어간다. 매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며 아무도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파국 속에 사람들은 휴대폰 속 쾌락 속으로 빠져든다. 취준생이라면 스펙 쌓기에, 고등학생이라면 수능에 자신의 청춘을 꼬라박으며 이른바 <품위>를 영위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행복을 그 안에서 얻으려 애를 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카이사르가 인간인 것처럼, 이반 일리치가 인간인 것처럼, 우리도 인간이며, 인간은 모두 죽고 따라서 언젠가 우리 모두도 죽는다는 것을.
이반 일리치가 사경을 헤맬 때 중학생 아들이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이때 이반 일리치는 마치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차가 실제로는 뒤로 가고 있고 나중에서야 갑자기 실제 기차의 방향을 깨닫게 되는 것과 흡사한 일'을 겪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더이상 거짓말을 그만하기로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므로써 가족과 자신을 해방시키기로 한다. 그 순간, 그의 안에서 죽음은 사라졌다.
이반 일리치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거짓말 하기를 그만두기를 결심했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 안에서 죽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 기차는 실은 뒤로 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그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 사회도 이번 일리치처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우리는 종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한국의 역사는 아직 너무 젊지 않은가?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였고 그의 시대는 격변의 태동기였다. 한편 우리는 격변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동시에 새로운 격변을 잉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상의 한계를 지나왔으며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된 이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어떠했어야 하는가? 그는 통제할 수 있는 삶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부족해도, 힘들어도, 때로는 품위를 잃고 자신의 인생을 낮추어야 할지라도 더이상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행복을 위조해내서는 안 되었다. 한국 사회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행복해지지는 못하였다. 이반 일리치의 종 게라심이 이반 일리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약해지고 있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고 그를 위로하고 돕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된 현실이 아닌 진실된 이상을 찾아야 한다. 죽음 혹은 종말이라는 재판에서 승소하는 방법은 인생 앞에서 스스로에게 거짓증언을 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