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 출입증을 받았다.
물론 임시 출입증이긴 하지만
포스텍 건물에 눈치 보지 않고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포항공대 도서관‘
인터넷에 서치하니 도서관의 틀을 깼다 뭐다,
한국도서관상을 받았다 뭐다 말이 많더라.
칭찬발림이 가득한 도서관에 떳떳하게 출입해본다.
겨우 출입증 따위가 완장처럼 느껴지기엔 처음이다.
이곳엔 다들 똑똑한 사람들밖에 없다.
겨우 한 학기째일 터인 석사생의 지식에 감탄하고
박사생들의 질문에 혹시나 말실수하진 않을까 마음 졸이며 대답한다.
뉴욕대 교수라는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님이 친히 특강을 해주는 lab에서
영어로 발표하고 영어로 discussion하는 랩미팅을 경험한다.
그야말로 상향평준화 된 집단.
이곳에 내가 어울리는 사람인지는 아직 자신이 없다.
인턴 첫 일주일은 정말이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신기한것도 감탄할것도 너무 많았던 일주일.
그 속에서 나의 부족함도, 벽도 느끼면서
나의 불안도 점점 덩치를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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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공대에서 인턴을 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이젠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변화가 있다면 새로운 인턴이 왔다는 것 정도다.
그 애는 과학고, 디지스트, 포스텍까지 그야말로 엘리트 루트를 밟아온 애였다.
나보다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고
심지어 성격까지 밝고 명랑한 그 아이를 보니
상대적으로 내가 더 초라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 애가 밝을수록 난 점점 입술이 말라간다.
그래도 내가 교수님 마음에는 들었나보다.
박사과정 선배가 전해주길
교수님께서 내가 2학기까지 계속 인턴을 하다가 내년에 입학하길 바라시는 것 같다하셨다.
재작년에는 한 학기 동안 쭉 인턴했던 학생들이 모두 석사 합격해서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럼 나도 거의 합격한거라 봐도 되는걸까 싶어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가 해결되니 그 다음 다가온 새로운 고민.
석사로 지원할까, 석박 통합으로 지원할까.
나는 본디 따분한 걸 못참는 사람이다.
겁도 많고, 소심하고, 불안감도 강하지만
이상하게 안주하고 머무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싫었다.
도전하는 것이 스트레스 수준이라면 안주하는 것은 삶의 의지가 사라지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 내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포항에서 도닦듯 공부만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K도 없는 이곳에서?
참을 수 없는 공허와 권태가 나를 끈질기게 괴롭힐텐데도?
그래서 요즘엔 석사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 같다.
뭐를 좋아하는지, 뭐가 하고 싶은지
어떤 게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내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만 하라는 건 자칫하면 의도치 않은 감옥살이가 될수도 있다.
나는 목적 없이 그냥 대기업에 가고 싶은 사람이고
그냥 이유없이 세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고 싶은 사람이라
내게는 돈과 명예가 아닌 나를 충만하게 만들어줄
많고 얕은 경험이, 다채로운 일상이 필요하다.
미래가 걱정이다.
훗날 취업하면 10년간 같은 회사에만 다녀야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걸 버틸 순 있을런지.
자신의 공허감을 외부의 새로운 무언가로 채우려고 하는 사람에게
현실은 너무 갑갑하고 따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