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투병이야기
술・담배도 안하시는 어머니가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자식들은 충격에 빠졌다. 6개월 선고를 받으셨다. 그 전에 자주 “내가 와 이리 힘이 없노?”하시면서 “소고기를 한번 사조.”하시면서 가끔 전화를 주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사드리지 못했다. 동생네가 잘 해드리기 때문에 나는 별로 해드린 게 없었다. 내가 셋째 고모인 정숙이 고모와 고모부를 모시고 집 가까운 ‘진주냉면’집에서 냉면을 사 드린 게 마지막이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셨고 집에서 일상생활을 계속 하셨다. 약을 드시긴 했지만 병원에서 “이 약을 써 보고 안 들으면 다른 약을 쓰겠다.”는 말에 “내가 뭐 실험용 쥐도 아니고...”하시면서 병원 치료를 안 하셨다. 시장도 보러 다니시고 친구들과 만나셔서 노시기도 했다. 동생과 대만 여행도 다녀오시고 꼭 가시고 싶으셨던 인도 불교 성지 순례도 다녀오셨다.
나는 그때도 어머니와 함께 다니지 않고 일상에 충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집에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고통이 심해졌을 때 다시 입원을 하셨다. 투약치료를 한 달 정도 받으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가끔 남편과 병문안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아픈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에 살이 하나도 안 빠지시고 고왔다. 수연 여사는 죽은 앞에서도 추리한(초라한의 사투리) 모습을 안 보이려고 애쓰셨다. 하기야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틀니를 끼신다는 것을 몰랐다. 자식들이 잠들기 전까지는 틀니를 빼지 않으시다가 잠든 후에야 빼시고 주무셨다는 것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올케가 어머니 속옷을 나에게 가져가고 싶으면 챙기라고 삶아서 보얗게 개어놓은 속옷을 보고 나서 나는 아무래도 어머니의 핏줄은 물려받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속옷이 들어있는 서랍을 뒤져서 찾을 정도로 정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러닝셔츠를 얼마나 반듯하게 개 놓으셨든지 새 옷인 줄 알았다. 펼쳐보니 겨드랑이가 다 닳아서 구멍이 난 옷이었다. 여름 겉옷도 거의 새로 산 옷 같았다. 지금도 몇 가지는 내가 입기도 한다. 딸들은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하면서 손 사레 치지만 까칠하고 시원한 질감과 고급 단추 때문에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단정한 옷들이다.
큰 시장이라 부르던 중앙 시장에 포목점을 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동무가 계신다. 그 곳에 가면 어머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돌아가실 날 잡아놓은 후에도 그곳에 자주 들러 친구들과 노시곤 했다. 큰 딸이 사법고시에 자꾸 낙방하자 삼만 원짜리 부적하나 쓰라며 불러서 산에서 기도하신다는 노인을 인사시켜 주신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은 안하였지만 어머니가 마음 써서 해 주시는 거라 삼만 원짜리 부적을 받아왔다.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절을 하라는 부탁과 함께. 딸은 로스쿨로 진학하여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살아계실 때 큰 딸은 공부 중이었다.
하루는 퇴근하는데 전화가 왔다. 장을 봐서 친구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려는 데 너무 힘이 없으니 태워달라고 했다. 버스도 못 타실 정도로 쇠락하셨는데 장까지 봐가지고 서 계셨다. 택시 불러서 그냥 가실 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큰 딸을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니었나!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가슴 미어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전부 내가 일에만 전념하고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병적인 성격 때문 인 것 같다. 지금도 변함없는 성격이지만 이 성격은 조금은 어머니께 물려받았다. 아보지가 55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역시 6개원 선고 받으시고 일 년을 견디다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자식들 대학교 보내느라 혼자서 고생하셨다. 그러면서 동네 대소사를 다 맡아하시고 시봉사단으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셨다. 암산력이 얼마나 좋든지 은행가서는 창구은행원 주판보다 어머니 암산이 더 빨랐다고 했다. 전화번호도 다 외우셨다. 나는 이 머리는 하나도 안 물려받았다. 노래도 한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르셨다. 이 머리는 동생이 물려받아 부럽게도 한 번 들은 노래는 곧장 부른다. 어릴 때 어머니는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운동장에서 군무를 했던 추억을 자주 떠올리셨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하시면서 춤을 추셨던 기억을 자주 떠올리셨다. 요리 솜씨도 뛰어나셔서 일가친척들이 다 좋아하셨다. 시골에서 재산은 없었지만 너무 좋은 추억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어머니가 해 주신 맛있는 음식들이다. 달콤한 전과는 어머니의 명절 음식 중 하나다. 도라지, 연극, 당근, 땅콩 등을 전과를 만들어 주셨다. 기름 없이 솥뚜껑에 부쳐주시던 호박전과 멸치볶음, 봄이면 찹쌀부꾸미 화전을 부쳐주셨다. 나도 식구들에게 화전을 부쳐주곤 한다. 이건 어머니께 물려받은 유산이다. 음식 만들기가 나의 취미 같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들을 재현해서 그대로 내 자식들에게 먹이고 있다. 귀찮다는 생각을 안 하니 어머니 닮은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입원할 때까지 손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돌아기시기 3일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셨다고 간병인이 전해 주었다. 그 깔끔하신 어머니께서 변을 자리에 보신 것이다. 그 때부터 음식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여기신 것이다. 어머니는 살이 하나도 안 내리고 통통한 몸에 얼굴에 살 하나 안지고 돌아가셨다. 절대 쪼그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까? 지난 주말에 영화 ‘더 룸 넥스트 도어’를 보면서 어머니와 함께 하지 못한 점이 많이 사무쳤다. 그럼 지금의 나는? 역시 일중독자 딸을 두고 있다. 지금의 나처럼. 그 때 어머니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었던 올케에게 고맙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태어나도 어머니의 며느리가 되겠다고 어버이날 편지를 써 주었던 올케가 있어 어머니는 그나마 위로가 되셨을까? 일가친척들을 어떻게든 다 보살폈던 어머니. 나도 자꾸 일가친척들을 한 번씩 뵈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어머니 딸로서 할 일 같다. 그러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딸인 나를 보여드리고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동생은 나보고 노무 빠듯하게 일하면서 살지말라고 한다. 동생도 어머니처럼 일만하다가 건강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짧고 굵게', 혹은 '가늘게 길게' 운명은 원래 타고난 것이다. 살만큼 살고 간다. 정해진 분량이 있다. 자식들과 태어날 손자, 형제와 조카들을 생각하면 생명을 아껴쓰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달래 화전을 흉내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