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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 Key Jul 19. 2023

일본 온천에서 발견한
인생을 더 풍요롭게 즐기는 방법

<누구한테 뭐래, 나부터 잘해야지> 시리즈 (3)


일본의 한 료칸, 나는 전체 4개 밖에 없는 프라이빗 야외 온천을 즐기기 위해 자리가 나는지를 수시로 체크하며 1층을 들락거렸다. 희안하게도 내가 프라이빗 온천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이미 4칸이 모두 사용 중이라는 불이 들어와 있어서 실패를 거듭했다. 늦은 밤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한 곳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한쪽 벽면이 계곡을 향해 탁 틔어져 있는 구조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과 눈, 그리고 온천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기가 막힌 장소였다. 방에 있는 작은 탕이나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용탕은 왠지 여기까지 와서 가기는 싫었다. 일본 료칸의 온센은 프라이빗 탕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러 번의 실패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드디어 들어간 프라이빗 온센. 미리 준비해 간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뜨끈한 탕 안으로 들어갔다. 발끝이 타오르는 듯한 온도에 놀랬지만, 찬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었는지, 온도에 익숙해진 탓인지 이내 목만 내민 채로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조잔케이 내의 한 료칸>


‘크, 이 맛에 사람들이 일본에 온천을 즐기러 오는구나.’

꽤나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곳에 앉아 있다니. 놀라웠다. 나는 매번 음료수를 바꿔가면서 온센을 즐겼는데, 딸기 우유가 가장 나에게 맞는 조합이었다. 만족스럽단 느낌이었다. 인생 이렇게 사는거구나.




술김에 여행을 추진하다


사실 일본의 온천 여행은 굉장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광화문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일본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를 제외한 3명이 모두 일본에 다녀온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나의 가족 중에서도 나만 아직까지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없었다. 술도 마셨겠다, 올해는 휴직으로 인해 자유 시간도 있겠다, 망설일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나는 료칸을 가겠다는 상당히 전투적인 마인드로 일본행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여행을 해본 적도 없고 일본어도 할 줄 모르니, 망설이게 되었다. 다행히 일본 여행의 경험이 많은 친구가 나의 이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가이드 해주기로 했기에 다시 용기를 냈고, 나는 그토록 고대하던 온천에 내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온천을 즐기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닌데, 2박 3일 동안 료칸에만 머물었다. 오랜 시간 료칸에 머물면서 관찰한 결과, 그렇게 오래 머무는 투숙객은 나를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나의 첫번째 일본 여행이자 온천 여행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서 최대한 프라이빗 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라이빗 온천은 한 번에 40분이 최대 허용된 시간이었기에 하루에 1~2군데씩 날마다 바꿔가며 즐기기로 했다. 

온천에서 나의 사랑 딸기 우유를 즐기면서 홀로 온센을 즐기던 와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의 조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생긴 답답함이었다. 일본에 입국을 한 순간부터 온천에 몸을 녹이던 그 순간까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난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할 줄 모르니까. 

편의점이나 마트에 갔을 때도, 온천 주변을 구경할 때도, 그리고 숙소에서 매일 다양한 음식이 서빙되는 식사 시간에도 대화가 필요할 땐 영어로만 간단하게 의사 전달을 했을 뿐,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외 여행이니까 언어 소통이 불편할 수도 있고, 그게 또 여행의 맛이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넘어갔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여행이 어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황홀했던 멋진 온천의 경험과 언어 장벽으로 인한 아쉬움이 함께 떠올렸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면, 나의 첫번째 일본 여행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이런 <만약에>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면, 

- 스시를 먹으러 가서 왜 주문한 스시가 나오지 않는지 물어볼 수 있었을테고, 

- 이자카야에서 유쾌하게 농담을 던지던 상황을 재미있게 즐길 수도 있었을테고, 

- 양갈비 집에서 옆에 앉아 계시던 일본 아저씨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물론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성격이 엄청 활발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사람은 아닌지라.

하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의 제로로 만들었다. 대화뿐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곳에 있으나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래서 발생하지 않았지만 <만일>이라는 조건으로 떠올리며 어쩌면 달랐을 수도 있을 다양한 상황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문득 잘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잘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본 여행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을 때, 감사하게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출발했고 해보고 싶었던 일본의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잘 사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럴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너 매월 일본에 온천 여행 갈 수 있어?”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맛있는 스시를 먹고 싶어서 일본에 비행기 타고 다녀온다는. 이렇게 접근을 해보면 나는 매월 여행을 갈만큼은 경제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잘 사는 건 아닌가? 중간 이상, 즉 중산층이면 잘 사는 것일까? 중산층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결국 돈이 아닐까? 그렇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아주 오래전에 봤던 기사가 하나 떠올랐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 접하게 된 기사였는데, 중산층을 나누는 기준이 국가별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물론 오래되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설문 조사에 기반이 되어 있는 반면 비교 대상으로 나온 국가들은 특정 인물이나 기관에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평하지 못했다는 반론이 있기는 했지만 재미삼아 볼만했던 기사였다. 


<나라별 중산층 기준>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이 기사가 떠올랐던 이유는 특히나, 프랑스에서 독특한 조건으로 중산층을 구별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모국어 외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 발상이 너무나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온천에 앉아 있던 내가 느꼈던 답답함과 연결이 되면서 프랑스의 기준이 마음에 와닿은 것이다. 중산층, 다시 말해 삶의 수준이 높다는 것에 대한 접근이 경제적인 기준이 아닌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제시되었기에 흥미롭다.

외국어를 한개 이상을 해야 삶을 더 잘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




외국어는 내가 잘 사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① 보다 자유로운 소통을 위한 수단

외국어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면, 이것은 내 삶을 얼만큼 다르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외국어를 잘하게 되면 언어 소통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 다른 국가에 친구가 생긴다는 것, 지금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편리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 사회생활에서도 더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것 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특히, 프랑스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나라이기도 하고, 유럽이란 지역은 워낙에 주변 국가로 이동이 물리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즐거워지겠는가. 


② 세상을 바라 보는 관점을 확장하는 수단

그리고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로서 의사 소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나의 시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매력이 있다. 언어는 그 문화권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 상자와 같다. 언어는 특정 문화의 사람들이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생존하며 쌓아온 세상에 대한 모든 경험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는 집합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등을 배울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속한 문화와 다른 문화의 언어를 배우면서 관점/가치관 등의 다름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나의 그릇이 키우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나의 인생과 품격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잘산다는 것, 즉 중산층을 가르는 기준으로써 외국어를 제안한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런 생각은 인도와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더 강하게 내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지난 시간 <무경계>라는 책을 읽으며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에 의해 만든 ‘선’들로 세상을 보고 소통한다고 했었다. 그 선을 옮기거나 지우는 활동이 많을수록 더 유연해지고, 더욱 발전된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내가 가진 선들을 움직이며 보다 다양성에 대한 수용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결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외국어와 나의 삶 연결하기


자, 그렇다면 좋은 건 알겠는데, 이러한 생각을 내 생활에 어떻게 적용을 해보면 좋을까?

어학에 대한 장점은 실컷 이야기했으니 반론의 여지는 없는데, 결국 문제는 나를 포함해 많은 한국인들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취업할 때 외국어 시험 성적은 하는 일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가 분명하지도 않으면서도 필수 조건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고, 한국말을 배우기 전부터라고 하면 좀 과장이고 한국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영어도 같이 가르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공교육의 12년 기간 동안 영어는 계속해서 우리 교과 과정에 포함이 되어 있다. 최소한 12년 이상은 영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전세계 문맹율이 낮은 국가 중에도 높은 순위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거의 온국민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의미이다. 그와 동시에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 한 두마디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아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다. 지리적으로 바로 옆에 다른 국가가 붙어 있는 유럽과 같은 대륙이나 북미와 같이 전세계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만들어진 국가도 아닌, 단일민족이라고 일컬어지며 지리적으로는 맞닿아 있는 국가가 없이 반도에 갇힌 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외국어를 한마디 이상을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의 외국어 교육 시장은 그 규모가 세계 탑에 이를 정도로 참 재미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공부를 하는데 왜 외국인 앞에만 서먼 그렇게 초라해지는 것일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영어를 더 배워보겠다고 캐나다에 와서 밴쿠버 도서관에 앉아 있으니 영어 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영원한 숙제 같다고 할까? 그렇다, 우리는 외국어를 여전히 숙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최소한 나는.


잘하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온천 여행을 통해 느낀 점을 이용하면 이 숙제를 조금 더 편안하고 실용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숙제를 잘하려는 접근, 다시 말해서 외국어가 내가 얼마나 우수한 사람인지를 평가하도록 허락하는 대신에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내가 더 잘 살기 위해 내가 ‘이용하는’ 도구로써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라면 어떨까? 

예를 들면, 약간은 거들먹 거리는 태도로 이렇게 외국어를 대하는 것이다.


‘뭐, 지금도 딱히 사는데 지장은 없기는 하지만,
내가 더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보려고 하니까,
내가 외국어, 너라는 녀석을 좀 써야겠다. 일루 와봐!’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후, 별도의 학원 등록은 하지 않았다. 철자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를 외우고, 쓰고 듣고 읽고 등 일반적인 외국어 공부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공부를 한 번 즐겨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유투브 채널을 몇 개 구독하고 시간이 날 때 틈틈히 보고 있다. 그리고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 매일 상황에 필요한 표현들을 배우고 있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남들 앞에 나서서 일을 하며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내가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한 수단으로 외국어를 가까이 두는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스트레스 없이 언어를 배운다고 말할 수 있고, 이런 생각이 가능해졌다. 

‘다음 일본 여행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 얼만큼 더 즐거워질까?’




더 재미나고 신나게 살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자


어차피 한 번 사는 세상인데, 이왕이면 잘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나의 인격이 더 멋있어지고 더 재미난 삶을 즐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외국어는 이제부터 내가 선택하는 수단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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