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 뭐래, 나부터 잘해야지> 시리즈 (4)
지난 시간, 내 인생 처음의 프랑스 파리의 여행의 기억을 꺼내서 글을 시작을 했다. 파리 여행기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많다. 날씨, 음식, 카페, 루브르 박물관, 다양한 성(Castle), 미술관, 에펠탑, 소매치기, 스위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통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을 했을까? 아마도 수년 만에 만난 나에게 동생이 처음 해주었던 하지만 뒤늦게 떠올랐던 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언가 옛날의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번 시간에는 <도로에선 사람이 무조건 먼저예요>라는 3가지 상황을 직접 경험해본 결과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몇일 동안 관찰했을 때 일관적인 행동을 보인 프랑스 운전자들을 믿고 실제로 도로 위에서 내 몸을 던져 그들의 운전 습관을 실험해 보았다.
※ 절대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았으며, 나라 망신을 시키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려드립니다!
사실, 처음 몇 번의 시도에서는 긴장을 했었다.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인데 어떻게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몇 번의 실행만으로 바로 알 수가 있었다.
가장 먼저, 건널목 없는 도로에서 길 건너려고 두리번 거리기를 해보았다. 사실 도로와 보도 사이에는 차들이 줄지어 주차를 해놓은 길이 많았기 때문에 이 실험을 위해 도로로 내려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첫번째 시도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내가 관찰했던 아이 손을 잡고 두리번 거리는 엄마의 모습처럼 나는 내가 길을 건너고 싶다는 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아예 그런 의도가 없었다. 시도해볼 장소가 어디가 좋을지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두리번 거리던 내 앞에는 어느새 지나가던 차들이 멈추어 섰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차가 서서 내가 건너갈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게도 나는 반 강제로 길을 건너야만 했다. 감사하다는 손인사를 하면서 말이다.
아니야, 이번 것은 제대로 된 실험이 아니었다. 다시 시도를 해야했다. 이번엔 제대로 길을 건널 작정을 하고 도로에 주차된 차량 사이에 서서 도로 양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들이 그냥 빨리 지나가면 뒤에 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도로가 비어질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운전하던 차를 멈추었다. 놀라운 것은 이 과정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케이, 그렇다면 보행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 건너는 것은 어떨까?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가기 위해서 많은 건널목을 건너야만 했다. 타이밍이 잘 맞으면 보행 신호로 딱딱 바뀌기도 했지만 때로는 기다려야만 했다. 다만 차선이 많은 넓은 도로에서는 실험을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무례한 행동일테니 말이다. 이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래서 처음에는 왕복 2차선 도로 정도에서 실험을 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의도하고 실험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건너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따라 건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길을 건너는 동안 보행자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고, 그러자 나는 마음이 급해서 뛰어서 빠르게 건너갔다.
‘에잇, 실험 실패다.’
라고 상심했는데, 내 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었고, 그들을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프랑스 운전자들은 사라들이 다 건너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차례 같은 상황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예 보행자가 건널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땠을까? 앞서 말했지만 루브르 박물관과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기 위해서 나는 여러 차례 길을 건너야 했는데 차량이 가까이 오는데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빨간불에서 길을 건너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고, 나도 어느새 그들과 함께 길을 건너는 것이 그렇게 어색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차량의 속도와 운전자들의 행동은 보행자가 위협을 느낄만한 경우가 없었다.
내 보름 동안 파리에서 경험한 것으로 프랑스 전체의 운전 습관을 평가하기는 부족할 수 있다. 일반화하는 것도 여전히 완벽하다 말할 정도로 나의 경험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나는 이미 파리에서 도로를 건널 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도로로 예상치 못하게 뛰어들어 사진을 찍는 경우에도 차량들은 도로 위의 보행자들을 위험하지 않도록 피하면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했다. 굉장히 조화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인터넷 짤로 돌아다니는 도로 위의 차들과 사람이 하나되는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마치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한 것처럼 서두르지 않았고, 꽤나 속도가 있게 달려오던 차들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오면 속도를 줄이면서 보행자들과 함께 도로를 나눠 쓰는 그런 느낌이었다.
너무 놀라웠다. 내가 관찰하고 실험한 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프랑스에 사는 동생에게 물어보자, 동생은 아주 명쾌하게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뒷통수를 아주 쎄게 맞은 기분이 들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말이었다.
프랑스인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특징, 예를 들어 시민 혁명을 이루어 낸 민족의 정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선진 시민,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의 사상의 전승과 같은, 뭔가 우와!하며 감탄을 자아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보행자는 도로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 단지 그뿐이다. 내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규가 다양하고 처벌이 강력해서 만들어진 습관이 아닌 느낌이다. 도로 위에 사람이 보이면 복잡한 사고 체계를 거쳐서 나오는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람은 안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베어 있는 것이다. 교통 법규에 의한 훈련이 아니라, 안전이라는 의심할 필요가 없이 중요한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 결과인 것이다. 내가 관찰했던 상황들을 이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의 안전에 대한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행자의 안전이라고만 이야기 하면 너무 보행자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운전자가 너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추가로 관찰한 것이 있는데, 운전자들이 보행자의 안전을 신경쓰는 만큼 보행자들도 운전자에게 위협이 될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암묵적으로 소통을 하며 서로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선을 잘 지키며 행동하는 그런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일 수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틀린 것이 아닌 것 같다.
드디어 파리의 매력을 발견하다
파리는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여성들은 파리를 로맨스의 도시라며 사랑하고 여행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세계적인 관광 도시이지만 나는 꼭 가보고 싶은 도시라며 열광하지 않았고, 그래서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감하지는 못했었다. 게다가 프랑스에 도착해서 처음 마주한 파리의 이미지는 길거리 흡연, 더러운 길거리, 변기에 커버가 없는 불편하고 청결하지 못한 화장실, 가격에 비해 낮은 수준의 호텔 등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가 선진국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프랑스 운전자들의 행동이 좋지 않았던 첫인상을 바꾸기 시작했고, 이러한 태도가 프랑스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파리에서 보고 느낀 것은 멈추어 서는 운전 습관이 아니라, 멈추어 설 수 있게 만드는 동기였다. 내가 운전할 때는 운전자이지만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보행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 다른 의미로 보자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그런 생각의 ‘여유’였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바꾸며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삶의 ‘여유’, 나이가 들면서 내가 그렇게 그리워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삶의 ‘멋’, 이러한 태도가 프랑스를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한국적인 멋을 프랑스에서 느낄 줄이야.
나는 우리네 삶의 멋은 '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우리나라만의 마음의 여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나와 입장을 바꿔볼 수 있게 해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우리들이 마음. 그런 정이 오고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데, 우리의 옛날이 그랬다.
오래된 기억 중에 참 그리운 것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라는 단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동네 사람들을 다 알고 지냈다. 꼰대같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집과 앞집 사이에 있는 골목은 사람과 짐이 움직이는 통로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은 밖같이라는 개념보다는 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난곡동 동네는 <응답하라 1988>에서 보여주는 동네와 비슷했고, 다른 집 상황을 먼저 생각하면서 서로 도와주는 그런 여유가 있는 동네 사람들의 멋있는 삶이 있었다. 나는 그 멋있던 삶의 향기가 너무 그립다.
지금은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저 멀리 떨어진 국가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소통에 관련해서 훨씬 좋아진 시대이지만, 어째서인지 삶의 여유와 멋은 이전보다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이든 세대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들을 배려하며 웃던 모습 보다는 언제나 내가 먼저라는 <me, me, me> 태도가 더 지배적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요즘 사람들은 잘못되었고 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려는 여유가 이전의 내 기억 속의 시절보다 부족해 보여서 아쉽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우리 나라는 여전히 사람들 간의 정이 많은 나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프랑스 운전자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의 여유를 떠올렸고, 그와 동시에 우리 나라의 도로, 운전습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 나라의 도로는 전쟁터가 된 것일까? 왜 그렇게 무서운 곳이 된 것일까? 여유라는 것이 존재하기 보다는 잘잘못을 제대로 나누려는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삭막한 곳이 될수록 여유와 함께 상식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특히 최근 국회에서 발의되어 개정된 도로교통법이 생각났다. 그 유명한 2023년 1월부터 시행하게 되는 ‘교차로 우회전 시 일시 정지’라는 개정된 법이다. 건널목, 특히나 교차로가 있는 건널목에서 보행자 사고가 많아서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정안인데, 교차로 우회전 시 일시 정지라는 이 법규를 단속하기 시작하자 많은 운전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혼란스럽다는 불평이 많았다.
“현재로서는 (우회전 신호) 법규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요.”
“(보행신호가) 초록 불이어도 사람이 없으면 지나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뒤에서 빵빵거리기도 하고 경적을 울리기도 하는 경우가 있어서...아니면 조급 급하게 옛날 버릇대로 우회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KTV국민방송 기사에서 발췌한 대표적인 불만들이다. 이처럼 많은 혼란이 생겨나니 뉴스에서는 변경된 내용을 자세하게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심지어 일시 정지의 기준까지도 설명하고 있었다.
"일시정지를 할 때는 차량의 바퀴가 완전히 멈춰 계기판 속도계가 완전히 ‘0’을 가리켜야 합니다"
운전자들이 일시 정지의 개념을 정말 모는 것일까? 세상에, 이런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이라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고 단속을 통해 벌점과 범칙금이 부과된다고 하니 단속되지 않도록 내 운전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보행자를 보호하고 사고를 예방한다는 원래 취지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어떠한 목적, 이 경우에는 보행자 사고를 낮출 목적이라는 좋은 명분이지만, 운전자의 행동을 강제적으로 제약을 하는 접근 방식이다 보니, 보행자 사고의 원인은 무조건 운전자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느낌이다. 보행자 안전은 운전자만의 책임이 맞는가? 보행자도 당연히 운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소위 말해지는 민식이 법이 만들어졌을 때,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좋은 명분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운전자이고, 사고의 책임도 운전자에게만 돌렸기 때문에 정상적이지 않은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히려 법이 시행되었을 때, 법규를 준수해서 운전을 하더라도 뛰어드는 아이들을 막을 길은 없었으며, 오히려 어린이들이 장난삼아서 운전자를 위협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여 폐지를 청원하는 상황까지 만들어진 것처럼 사고의 원인을 한쪽으로만 몰아가며 위반 시 처벌하는 접근은 순기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웠다.
어차피 사회에서는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만 살 수 있는 사회적인 존재이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한쪽을 일방적으로 죄인으로 만드는 법으로 규제를 하는 방법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법에 의해 내가 상대를 죄인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언젠가는 반대로 내가 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배웠지만 기억도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써보고 있는 표현이 있다.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할지를 떠올려 보는 노력을 해보라는 표현이다.
나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의 경험에서, 프랑스 운전자와 보행자는 서로 입장을 바꾸어 보기 위해 남들의 신발을 신어보는 행동을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느꼈고, 그로 인해 도로는 안전한 곳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새롭게 배워서 익히자는 것이 아니다. 내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외국인들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정'이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정서가 우리에게는 수천년에 걸쳐 흘러 내려오고 있다. 배려라고 하면 전세계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우리 민족 아닌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바쁘게 살다보니 도로 위에서는 살짝 잊고 지냈던 우리만의 그 정서를 불러 올 때가 된 것 같다.
"내가 우회전을 하는데 속도계의 속도가 0 이 되도록 세우는 것을 일시정지라고 하며, 보행자가 있을 때 일시 정지를 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런 설명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이 오면 지나가도록 기다리면 그만 아닌가.
운전자로써, 보행자로써의 각자 권리를 주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운전할 때는 운전자이지만, 운전하지 않을 때는 보행자가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내가 운전을 하고 있지만 저 밖에는 나의 가족, 친구, 우리 동네 사람들이 걷고 있다고,
반대로 내가 걷고 있을 때는 나의 가족, 친구, 우리 동네 사람들이 운전을 하고 있다며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 이런 '정'이 필요한 시간이다.
잠시 잊었던 '정'의 마음으로 조금 더 여유 있는 태도를 가진다면, 블랙박스에 의존하며 서로의 잘못을 주장하며 싸움을 하는 도로가 아닌 우리 나라의 도로에서도 서로의 안전을 위해 시간이 멈추어지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의 도로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 모습일지 즐겁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인생의 '멋'을 아는 우리로 돌아오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