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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생 Oct 23. 2023

치매엄마의 우당퉁탕 유쾌하고 개구진 하루(18)

 치매 환자도 가족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창작은 누구나의 본능이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인간에게는 창작이 본능이고 개개인 모두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고.

기어 다닐 적에 매일, 그것도 매번 다른 것을 만들어내던 창작 경험이 아이에게 성취감을 주었고, 동생도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던 그 황홀한 경험이 내면 깊숙이 내재돼 있다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연구에서 밝힌 바 있다. 인간이 자신의 똥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에는 이토록 경이로웠을 텐데 자라면서 똥이 불결하다는 인식을 수용하면서 그 능력을 억압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든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 또다시 창작 욕구가 발현된다고.

그래서일까 은퇴 후 그림을 그리겠다는 지인들을 종종 마주한다.     

조카가 5살 때 가족여행을 갔다가 실랑이 한 기억이 떠오른다. 계곡에서 큼지막한 돌멩이를 깡통에 주워 담고 놀길래 이제 집에 가자고 돌멩이를 계곡에 부려 놓는 순간 조카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의아해서 "왜 울어 연식아 집에 가기 싫어? 더 놀고 싶어?" 했더니 아니란다. 

 "집에 가져가서 심을 거라고 고모"

세상에나 돌을 심어 돌이 열리게 하겠다니. 이것도 프로이트가 말하는 창작 본능인가.

뒤에 커다란 군용 덤프트럭이 따라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깡통에 가득 담은 돌멩이로 어깨가 기우뚱해져도 낑낑대며 제 길을 가던 어린 조카의 당당함.        

엄마의 창작 본능을 건드리는 건 매번 좀 다르다. 

이른 봄, 풀에 씨가 맺히면 감당하기 힘들다고 보이는 족족 뽑아 버리더니 이번에는 버들개지도, 단풍나무 어린 순도, 덩굴진 풀도 뽑더니 그것들을 집에 가서 심겠다는 거다. 

“아니 왜? 풀 아니야?”

“아니야! 좋은 거야. 좋은 거라고.”

몇 개월 전만 해도 화초도 풀이라고 뽑아버리더니 이번엔 풀을 화초라며 집에서 가꾸겠다니 치매로 인지기능이 떨어져 보이는 행동이겠지만 나는 이것도 창작 본능이라 우기고 싶다.     

어제 산책길에 엄마는 돌멩이를 주웠다. 자세가 위태로우니 앞으로 고꾸라질까  조마조마한 데다 걷는 다곤 하지만 거의 제자리걸음이라 서있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것이 걸을락 말락,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온몸이 간질거려서 답답했다.      

 아니 도대체 돌멩이를 왜? 한동안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줍겠다고 버티는 엄마의 꺾이지 않는 의지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검정 봉지 들고 엄마 뒤를 따르면서 냄새에 진저리 치다가 산책 코스를 바꿨는데 이번엔 돌멩이라니 뭐지? 

“엄마 돌멩이를 왜 주워?”

엄마의 표정은 진지하다. 

“끓여 먹을라고. 별 맛은 없는데 몸에 좋은 거야. 예전에 많이 먹어봤어.” 

용도에 효능에 경험까지 나를 설득하려고 길게 말한다.      

하이고~ 예상치 못했던 엄마 말에 폭발하듯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함께 나선 언니와 강아지 아리까지. 웃음은 산책로를 따라 곡선을 그리다 나무 밑동을 타고 올라가 하늘로 흩어졌다. 답답하던 마음도 그 바람에 시원하게 뚫렸다.

아이들의  뜬금없는 소리가 엉뚱하고, 활기가 넘쳐 더 사랑스러웠는데 엄마에게서 나는 그 모습을 본 거다. 이른 아침 수영장에서 만난 꼬마의 말과 오버랩 되며  나는 유쾌했다.

요즘 나는 한 팔 접영을 배운다. 돌고래처럼 웨이브를 타고 입수했다 여유 있게 출수해야 하는데 나는  도통 새우처럼 팔딱거리기만 한다. 답답하던 차에 옆 라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영하는 아기 돌고래 두 녀석이 귀여워 나도 가르쳐 달라 청했다.     

5살, 7살 정도 자매로 보이는 두 꼬맹이는 쑥스러워하며 시범을 보여주더니 나더러 해보란다. 그래서 엉거주춤 한 바퀴를 돌고 오는 내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7살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더니 힘을 주어 말한다. 

“그런데요, 동생이 8인분 컵라면을 가져왔어요. 엄청 커요!”

“응? 하하하 오오~~~ 그래 신기하다” 폭소가 터졌다. 

당연히 수영 자세에 대해 아이가 얘기할 줄 알았는데 맥락 없이 내뱉는 말과 아이의 표정이 더 할 수 없이 유쾌하다. 상황에 맞춘 적절한 말이 아니라  그저 떠오르는 대로 표현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산지직송, 살아 숨 쉬는 날 것 과 같은 싱싱함이 느껴진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다 살아 내신 후 유아기로 돌아가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한 엄마의 말과 현재, 유아기를 살고 있는 아이의 말에서 나는 창작의 본능을 이렇게 우연히 배운다.  

        

“그림자는 표현을 허락받지 못한 모든 삶의 모습을 표상한다. 부정당해 잃어버린 감수성은 느닷없이 우리를 감상적인 행위에 빠져들게 하고, 버림받은 창조성은 우리를 권태와 무기력으로 몰아넣는다. 그림자는 어떤 식으로든 비밀리에 작동하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중간항로에서 내 그림자를 의식 수준에서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168쪽)     


어쩌면 엄마도 제임스 홀리스의 말처럼 억압해 두었던 자신을 만나며 다시금 잃어버린 창조성을 회복하는 시간대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와 아이를 보며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억압했던 내 생의 에너지. 내 안에 그림자를 만나 나의 창조성을 일깨워 보고자  한다.  두서없이 쓰는 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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