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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생 Jul 18. 2024

낯선 곳에서 날 것의 감정을 만나다.

코타키나발루 탄중아루 해변의 낙조를 보며

              

30년 지기 친구와 적도부근에 위치한 코타키나발루로 3박 5일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친구는 일생 만날 수 있는 세 명의 은인 중 한 명일 겁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1학기 방학하는 날 자퇴서를 제출하려 할 때 제 손을 잡아주었던 친구거든요.      

 “1학기 등록금은 방학까지 유효해 두 달 동안은 아직 대학생이야 벌써 내려놓을 필요는 없어”라고 제게 말해주던 그 친구의 대학생이란 신분을 두 달 더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자퇴서를 말없이 가방에 넣었습니다. 저로서도 너무나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신분이었으니까요.     


가난한 집 셋째 딸인 제가 경제적인 이유로 언니도 포기한 대학에 입학하니 마음이 불편했고, 더군다나 졸업 후에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를 재촉하는 가족의 눈살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국어국문과였거든요.


엄마와 언니가 오빠와 저 그리고 동생의 학비를 벌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도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4년이 길게 느껴졌고, 제가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집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이 컸습니다.     


 그래서 유보된 두 달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죠. 가리봉동에 있던 삼립식품에서 하루 12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의 절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용기가 생겨 앞으로 등록금의 절반은 방학에 채우고 학기 중에는 학점으로 장학금을 받자고 말입니다. 저는 다행히 그렇게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졸업장의 힘을 알게 됐습니다. 결정적으로 고졸 신분으로 아르바이트할 때와 임금 차이가 컸던 겁니다. 친구의 조언 덕에 학업을 마치고 입시학원에서 국어강사를 하며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제게 친구와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저와 그런 인연이 있는 친구가 잘 살고 있으면 좋으련만 딱히 그렇지 못하니 어느새 제게 망상이 생겼던 가 봅니다. ‘내가 이 친구보다 상황이 나으니 양보해 주고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니 비교심이 제 마음 밑바닥에 있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그 양보와 이해에 대한 대가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럿이 있는 가운데 제말을 먼저 거들지 않을 때  어이없게도 친구를 원망하는 저를 바라보며 떠오른 구절이 있어 소개합니다.


알랭드 보통은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고 말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낯선 곳 낯선 시간을 맞으니 제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나 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친구보다 외적인 조건이 우월하다고 무언가를 더해 주어야 하고 또, 해 줄 수 있다는 망상이 친구의 마음도 불편하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는 더 이해해 주고 참아주려고 계획하고 있는 상대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를 존중하는 자세일 텐데 그것을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망상의 시선으로 행해서는 아니 됨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기준점을 세우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처럼 상대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함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름 여행은 어디로 계획하고 계신가요.

부디 마음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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