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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율 Feb 19. 2023

뮤지컬 <호프> 누군가의 세월을 함께 살아내는 110분

국내 창작 뮤지컬 <호프>

* 본 글은 뮤지컬 <호프>의 스포일러를 아주 약간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호프>가 돌아온다. 내 인생 가장 많이 본 작품이다. <호프>를 처음 본 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옷소매는 다 젖었고 눈치 없는 콧물까지 흘러 훌쩍 소리는 옆사람의 관람을 틀림없이 방해했을 것이다. 다음부턴 휴지를 넉넉히 챙겨갔다.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베르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글을 쓰는 요제프의 재능을 동경한다. 요제프는 자신의 원고를 태워달라는 말을 남긴 채 요절하고 베르트는 요제프의 재능을 지키기 위해 그의 남은 원고를 소중히 보관한다.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며 시작된 2차 세계대전. 베르트는 자신의 연인 마리에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요제프의 원고를 남기고 떠난다.
- <호프> 시놉시스 -


마리에게 맡겨진 요제프의 원고는 전쟁 속에서 마리가 쥘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나고 베르트에게 외면당한 후에도 원고에 대한 마리의 집착은 끝나지 않는다. 마리의 딸 호프는 피폐해진 엄마를 버리고 떠나지만 엄마가 죽은 후 엄마가 있던 집으로, 그리고 원고로 다시 돌아온다. 호프는 엄마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원고를 증오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게 만든 유일한 희망인 원고를 놓지 못한다. 자신의 엄마처럼.



원고?

호프라는 사람과 의인화된 K(원고)가 주인공이다. 과거 호프를 포함한 호프의 주변 인물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등장한다. 원고는 글이 쓰인 문서를 의미하는 그 원고가 맞다. 원고의 물성은 뭐랄까. 책이나 글보다 사무적인 느낌. 단어가 처음엔 사뭇 낯설다. 하지만 작품을 본 후 원고라는 단어의 이질감은 사라지고, 흡사 내 평생 친구 김원고 가지 마... 를 외치게 된다.




호프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관객


드라마 1화에서 현재 시점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곧이어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가 전개되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결말이 곁들여져 있을 현재 시점 이야기의 맛만 보여주고서 과거 이야기로 나를 휘두르는 작가에게 약 오른달까. 또는 “주인공이 한심해 보이겠지만 다 이유가 있어 왜냐하면..." 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드라마는 더 싫다. 성격이 급한 나는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되냐고요, 묻다 지쳐 중도 이탈해 버릴수 있다.


<호프>의 이야기 구성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 사건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베르트와 요제프가 대화하는 장면이 처음으로 펼쳐지는 과거 장면이다. 호프-마리-베르트-요제프 다리 세개를 사이에 둔 요제프는 호프랑 한번도 만나지 않는 인물이다. 관객은 요제프 손에 있던 원고가 호프에게로 전달되며 원고와 호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이 이야기는 길다. 하지만 그닥 궁금하지 않은 주인공의 과거를 나에게 입력시키는 여타 드라마처럼 지루하지 않다. 극의 막바지 원고를 떠나는 호프를 보면 내가 꼭 호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는 듯 그의 다음을 응원하며 안도한다. 한 사람의 삶을 110분의 시간 속에 어떻게 담아냈길래, 내가 <호프>에 환장하게 된 것인지 그 매력을 곱씹어 본다.



알앤디웍스
비난할 수 없는 모든 캐릭터


<호프>에는 단지 주인공에게 어떤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등장하는 소모적인 캐릭터가 없다. 법정에 있는 인물들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섬세하게 입체적이다. 그들의 선택에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호프에게 결과적으로 시련을 안겨주었더라도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심지어 호프를 버리는 카델과 마리를 버리는 베르트조차 무조건 비난하기 어렵다. 신도 악마도 모든 게 뒤죽박죽인 세상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그 선택에 호프가 피해를 입었지만, 호프 역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은 배신한다. 내가 틀린 게 아니고 틀린 세상에 태어났다는 카델의 비겁한 변명은 호프를 비롯한 모든 인물이 처한 상황에 적용된다. 한 명 한 명의 사연은 과한 생략으로 뜬금없거나 과한 설명으로 지루하지 않은 적정 수준을 지킨다. 호프뿐 아니라 모든 인물에 자연스럽게 이입하다 보면 '그래서 호프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같은 다급한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다.



강약 조절로 집중하게 만드는 이야기 구성


호프에게 압박을 가하는 존재는 세 가지로 나눠진다. 법정의 사람들, 과거 기억, 그리고 K. 극 초반 호프를 몰아세우는 존재는 법정 사람들뿐이다. K는 호프를 부축하고 호프를 대신에 법정 사람들에게 소리치기도 한다. 호프에게 가장 다정했던 K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호프에게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호프의 아픈 기억을 마주하게 만든다. 호프를 압박하는 각 존재들은 주요한 장면마다 쉴 틈 없이 대사를 교차한다. 과거와 미래의 인물 간 시간이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장면에서 빠른 속도로 대사와 가사를 뱉어내는 배우들의 실력을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작품의 묘미다. 그러면서도 카델과의 즐거운 한때나 암시장 경매 장면에서 잠깐씩 숨을 고를 수 있다. 경매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야광빛 무대 연출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도 오묘한 초조함을 남긴다.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와중의 강약중강약 적당한 분위기 변화가 관객의 집중력을 붙잡아둔다.



작지만 강한 앙상블(책갈피)과 무대 디자인


아무리 화려한 대극장 무대에서도 앙상블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구색 갖추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호프>의 앙상블인 책갈피는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책갈피는 호프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과거 호프의 고단한 한때를 표현해 주는 연출자가 되기도 하고, 인물 사이 긴장감을 높이는 소품(기차)이 되기도 한다. 기찻길 장면은 심각한 장면이다. 여기서 조명 하나만 든 채로 나란히 줄 선 사람들이 기차랍시고 지나가는 장면은 자칫 우스울 수 있다. 하지만 담담한 무대 디자인 위, 실체와 똑 닮게 만든 대형 소품이나 그래픽을 사용했다면 훨씬 부조화스러웠으리라. 무대 위를 거의 떠나지 않고 녹아 있던 앙상블 배우들이 만드는 기차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튀지 않는다. 또 무대의 난간 네 개는 호프와 법정을 가르는 역할을 하다가, 고단한 노동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앙상블의 연기력이 더해진 무대 소품은 전혀 다른 용도로 쓰여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한 가지의 역할을 하는 아주 분명한 형태의 소품이 많이 등장하는 공연보다 최소한의 장치로 상상력을 자극할 때 관람하는 재미가 더해진다.

연합뉴스



가까운 사이의 누군가와 알고 지낸 세월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낯설던 처음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 서로 참 많은 걸 공유하게 되었구나 느낄 때. 첫 만남은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바로 어제 같기도 하다. <호프>의 막이 내릴 때 꼭 그런 느낌이 든다. 첫 장면의 낯설던 호프는 사라지고 내가 가장 잘 아는 호프가 되어있다. 호프가 마지막으로 법정을 떠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호프의 첫 등장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훨씬 오랜 시간 전 호프를 만난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지나간 공연 시간을 깨달을 때 110분이라는 시간을 호프와 잘 살아냈구나, 후련하고 씁쓸하다.

 



<호프>는 프란츠 카프카의 원고 소송 사건을 모티브*로 쓰인 이야기다. 그래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서 인용한 대사가 많으니 프란츠 카프카의 팬이라면 관람을 강력 추천한다.


* 모티브일 뿐 실제 사건과 상이한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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