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내 빠레트에는 흰색과 검은색이 없었다. 무채색을 쓰는 순간 수채화는 단번에 탁해질뿐더러, 흰색과 검은색은 색을 탐구할 여지를 지워버리기도 해 미술학원 선생님이 절대 못쓰게 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완전한 흰색은 없다. '완전한' 흰색의 정의조차 무엇인지 모르겠다. 흰색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에도 그림자가 생기니 어느 부분은 분명히 어둡다. 옆에 다른 색의 물체가 있으면 흰 물건도 은은하게 색을 입는다. 몇 년 전 개발된 반타블랙이라는 물질은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으로 화제였다. (지금은 더 검은 물질이 개발됐다고 하는데 반타블랙보다 안 유명한 것 같다.) 빛의 99.. 점 몇 퍼센트를 흡수해 버리는 반타블랙 사진은 굉장히 비현실적이다. 황동 동상 두 개 중 하나에만 반타블랙을 칠한 사진은 검은 동상을 찍은 것이 아니라 동상을 찍은 사진 위에 검은색을 칠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반타블랙조차 0.. 점 몇 퍼센트의 빛을 반사하고 흰색은 주변 물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니 세상에 단순히 검은색과 흰색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어디 있을까.
유화 배우는 첫날 선생님께 흰색이랑 검은색 물감을 써도 되냐고 물었다. 유화는 캔버스 위로 물감을 다 덮어야 하고, 기름을 섞지 않기 때문에 흰색 물감을 쓴다고 말씀하셨다. (기름을 섞어서 농도 조절을 하며 그리는 유화도 있던데 그건 고수들이 하는 건가. 일단 나는 초보니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수채화나 소묘에서 밝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색을 비워야하고, 붓질 실수라도 하면 밝음은 쉽게 침범당하고 말았는데, 밝음을 채워 어두움을 덮을 수 있다니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수채화랑 유화의 또 하나 차이점은 수채화는 붓을 자주 씻고 유화는 붓을 잘 안 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흰색 물감을 쓸 때에는 붓에 묻어 있던 색이 섞인다. 처음엔 짜둔 흰색 물감을 오염시키는 게 싫어서 붓을 막 씼고 싶었는데, 이제는 물감끼리 섞여도 묻어도 와악 놀라지 않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묻혔던 색에 흰색 물감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어떤 밝은 물체 역시 주변의 색에 영향을 받는다. 요즘은 흰색 물감이 덜 섞여 생각보다 밝지 않게 색이 만들어져도 일단 조금 칠해본다. 오히려 자연스러울 때도 많다.
여전히 어둠은 색을 섞어서 만든다. 물감으로 이미 만들어져 나온 검은색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검은색물감을 그냥 쓰면 반타블랙을 찍은 사진처럼 갑갑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어두운 색은 고동색과 남색 물감을 섞어 만든다. 이 색에 고동색과 남색 물감의 비율을 조금씩 바꿔가며 따뜻하거나 차가운 느낌의 어둠을 표현한다. 지금 퓨마를 그리고 있는데, 퓨마의 얼굴 뒤에서 약간 해 질 녘의 노란빛이 비친다. 목 부분의 아주 어두운 색부터 보라색과 흰색 물감을 조금씩 섞으며 얼굴로 가다가 퓨마의 털이 보송송 보이는 얼굴 경계부에서는 노란색과 흰색 물감으로 빛이 반사된 밝은 털을 표현한다. 이 흐름을 그냥 검은색 물감으로 만들긴 싫다. 어둠 안에 섞여있던 여러 색 중 몇 가지가 빛에 따라 때에 맞게 밝아지는 것처럼 물감도 이를 따라야 할 것 같다.
화실 선생님이 그림의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고쳐주며 시범을 보여주는데, 보통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운 부분, 그리고 갑자기 밝거나 갑자기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신다. 밝기 정도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그림은 좀 더 실제와 가까워 보인다. 사실 생각보다 밝음은 밝지 않고, 어둠도 어둡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