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coyang Dec 23. 2023

신 여사님  처음 만난 날

"어머 어서와 방에 들어가 있어라 배고프지?"  남자친구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졌던 긴장감은 그 몇마디에 좀 풀어지는것 같았다. 두리번 두리번 할것도 없는 방한칸 부억한칸의 작은 곳이었다. 지금 같으면야 얼른 부엌으로 가서 제가 할게 들어가세요 했겠지만 누군가 어른을 만난다는 게 익숙하지 않던 일이라 그 시간이 어색했다. 곧 "이거 이거  "하면서 남자친구한테  밥상을 건네주셨다. 잠깐동안 지글지글 소리가 났던게 이거였구나 하면서 계란옷을 입힌 분홍소세지에 눈이 갔다.  가끔 외할머니가 해주셨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분홍소세지였다.(철없었어 진짜)   "어서 수저들고 먹어봐" 라고 재촉하셔서 얼른 소세지부터 먹어 보았다.





내가 만난 남자친구(UDTㅋ)의 엄마는 할머니였다. 호칭을 불러야 할때 할머니 소리가 나올 뻔 했으니까... 오랫만에 내려 왔다며 아들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 우리가 밥 먹는거 끝까지 다 보시면서 좋아하셨다. 이름을 물어보시고 금새 외우셔서 내이름으로 불러주시는데 확 올라오는 생각 " 모야 남친을 만나면 느껴지는 따뜻함 그런거랑 똑같잖아! " 말에서 눈빛에서 느껴지는 아들을 향한 사랑은 전기처럼 나에게도 흘렀었다. 우리 어머님은 나중에 우리집에서 106세까지 사셨는데 그때 까지도 처음 만났던 그때,  알맞게 따뜻해서 맛있었던 분홍소세지 온도처럼 더 뜨겁지도 더 식지도 않는 마음의 밥상을 주셨다. (어머님 생각하니 또 마음이 울렁이네)  


어머님의 큰딸이 우리엄마랑 동갑이고 큰딸의 여식(조카)이 남친과 동갑이어서 우리어머님과 큰딸이 한해에 같이 출산을 하셨단다. 아버님은 남친이 군대갔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을 통해 들은 아버님은 안동 권씨 선비중에 선비셨다. 선비이셔서, 그랬을까? 당시 작은 마을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가문의 손이셨는데 한번씩 나가시면 한쪽 땅을 팔아 그걸 다 쓸때까지 시내에서 안 돌아오셨다 한다. 큰고모가 기억하는 어린시절과 우리남편이 기억하는 어린시절은 너무나 물질적으로 달랐다. 너무 부유했고 너무 가난했던 시절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지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집 땅을 소작하며 살던 먼 친척들에게 헐값에 땅이란 땅은  다 팔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들어오셨을 때  낳은 게 막내라고 하셨다. 48세에 득남?   "어릴때 아이들이 니네 아버지는 할아버지야"라고 하는게 제일 싫었다고 남친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같으면 진짜 무슨 사단이 나도 났지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못나가게 하고 애들  키워야할 땅은 지켜냈을텐데..라고 생각했다. 현대인은 이해 못하는 사대부 며느리 그 공손자체이셨다 . 그렇게 자손을 8명 보셨는데 두명은 어릴때 잃고 위로 딸셋 아래로 아들셋을 두신 우리어머님의 최대 자부심 " 그렇게 나가서 놀아도 손은 꼭 나한테 보셨지" 라고 하셨다. 나는 웃으면 안되는데 이대목에서 웃음이 나와서 진짜 허벅지를 꼬집을수 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아버지를 좋아했던 어린 신씨 가문의 댕기머리가 스쳤다. 내가 만났을 때 연세가 75세이셨으니까 아마 유관순언니가 만세운동 하던때 ? 삼일운동때? 쯤인가 ㅋㅋ  태어나신 듯하다. 언문도 다 읽으시고 어릴때는 몸종도 있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신씨 가문에 태어난  할머니 아니 어머님 함자는 정자 임자  "신정임" 내이름보다 훨씬 예뻐서 놀랐다. 잘살으라고 예쁜이름까지 얻었던 어머님이었는데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한과 정은 나에게로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은  한권의 책으로 내맘속에 자리잡고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말년에 겪어야 했을 상황은 너무나 뻔했다. 자식들을 위해 바느질을 하셨고  돈이 없어 서러운 모든 경험들을 다 하셨다. 남편에게 향했던 원망과 미움은 말년의 아버님한테는 독설이 되어 박힐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님은 어린 막내와 장에 나와 팔리지 않는 물건을 놓고 장사는 안하고 막걸리만 마셨다고 어린막내가 나중에 말했었다. 너무나 당연한 원망이고 독설이었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남은 어머님에게 그 말들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자책의 독이 되어 돌아왔다.  절이란 절은 다 다니시면서 아버님을 위해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고 그렇게 한 10년동안은 공양보살로 여러 절에서 생활하셨고 85세쯤인가 막내네로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사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초이스가 하나도 없이 산다는거 이게 진짜 듣는 사람 미치게 만드는거였다. 가끔씩 들었던 신정임씨 스토리에 자주 올라오는 부화를 끄집어 내리며 ... 너무 가난해서 남편의 작고작은 운동화가 그의 발가락을 꼬부려뜨리는, 약이 없어서 체한 어린 자식한테 새우젓을 먹일수 밖에 없었던, 그거 먹고 죽다살아난... 셀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신정임님! 묘덕화 보살님! 잘 계신가요? 보고 싶네요."  시집올때 젓가락하나 못해주셨다고 미안해하고 돌아가실 무렵 너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하고  '어머님의 미안하다' 는 나한테는 정말 큰정이 되었고 '어머님의 가난함'은 나한테는 큰사랑이 되었다. 물질의 잣대로는  비교 안되는 무형의 마음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들과는 비교불가인 것이다. 전기처럼 찌릿하며 오기도 하고 물처럼 첨벙거리며 전해지기도 한다. 모든 인간의 감정들을 다 사그려뜨리고 원점으로 회귀하게 하는 건 언제나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다. 나는 그걸 배웠고 지금은 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