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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Oct 20. 2023

간 작은 며느리의 은밀한 일탈

첫 해외여행, 대성공!

반드시 기억하고픈 여행이 생겼다. 추석 명절 끝에 다녀온 2박 3일간의 대마도 캠핑. 나의 첫 해외여행이자 잠자리를 등에 짊어지고 떠났던 기록적인 여행이다. 

장장 6일간의 추석 연휴가 끝났지만, 남편과 나는 일상 복귀를 미루었다.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기념하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비밀스럽고 조심스럽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병중인 시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어머니를 떠올리니 죄스러웠다. 실토하면 무척 기꺼워하며 용돈을 쥐여주실 분들이지만 나는 자그마치 25년째 ‘간 작은 며느리’ 캐릭터를 고수하는 중이다.     


9월 초, 남편은 밤마다 수상했다. 내 얼굴보다 휴대폰을 더 많이 쳐다봤다. 뭔가에 빠져 몰두하는 모습이 무척 은밀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카톡으로 여권 사진을 요구했다. 저기요, 무슨 일인가요, 물을 새도 없이 대마도행 승선 예약권을 보내왔다.

대마도라면 일본, 근데 배를 타고 간단다.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없었다. 나는 아직 내 나라를 벗어나 본 적 없는 해외여행 무경험자다. 새것 같은 여권을 갱신하며 비행기 탈 날만 손꼽는데 갑자기 배를 타잖다. 어지간히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닌가 싶어 하마터면 맞짱 뜰 뻔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편의 눈치 없는 도발은 커다란 선물이었다. 뭘 타면 어때, 학수고대하던 첫 해외여행이잖아. 생각을 바꾸자 설렘이 폭발했다. 그의 휴대폰에 무심한 듯 하트 이모티콘 몇 개를 던졌다. 곧장 신나서 앞 구르기 하는 아저씨 이모티콘이 배달됐다. 역시, 전쟁과 평화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은혼식에 어울리는 여행이라면 휴양이나 호캉스일 테지만 우리는 배낭여행을 결정했다. 남편과 나는 캠핑을 좋아한다. 낯선 땅에 텐트로 집을 짓고, 함께 먹을 밥을 끓이고, 도란거리며 밤을 보내다가 새 아침을 맞이하는 여행. 상상만으로도 마음속에 환희가 들어찼다. 

일사천리로 여행 준비가 시작됐다. 남편은 야영장과 렌터카를 예약하고 엔화를 환전했고, 나는 ‘쓰시마 부산 사무소’에 요청한 대마도 자료를 공부하며 세부적인 일정을 짰다. 로밍 신청과 국제 면허증 발급, 여행자보험도 가입했다. 추석이 겹쳐 분주했지만, 차례상 차리는 며느리 마음이 비눗방울처럼 동동 뜰만큼 준비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추석 연휴, 최선을 다해 자식 노릇을 했다. 여행을 함구한 채 집으로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배낭을 꾸렸다. 배 타기 전날 부산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하루치 짐을 추가하고 보니 체감상 무게는 배낭 하나당 30kg이 훨씬 넘었다. 그랬어도 가방을 짊어지는 마음이 가뿐했다. 마침내 떠나는 내 생에 첫 번째 해외여행이라서 흥분한 탓이다.

뒤에서는 발만 보일 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번갈아 운전하며 4시간을 달려 부산 자갈치 시장에 도착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생선구이로 푸짐한 저녁을 먹였다. 그러더니 또 배낭을 지게 했다. 숙소까지 걸어가야 한단다. 배불리 먹인 이유는 실수로 주차장이 없는 호텔을 예약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유명한 ‘10원 빵’을 사주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맞짱 뜰 판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승선표를 발권받은 순간 여행이 실감 났다. 시끌벅적한 틈에서 난생처음 입국 카드와 휴대품 신고서를 작성하고 배에 올랐다. 감격, 기쁨, 설렘, 떨림, 긴장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2시간가량 바닷길을 달려 대마도 히타카츠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낯선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험 물품으로 자진 신고했던 칼, 가위를 찾아 입국심사대에 섰다. 직원이 뭐라 묻기에 정신을 차리고 소심하게 답했다. “쓰리 데이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마침내 여행자가 되었다. 대마도 북부의 작은 도시, 히타카츠의 첫인상은 말갛고 순했다. 해맑은 아이의 웃음 같아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계절은 가을 문턱을 넘어선 듯 서늘한 바람기가 묻어났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방향감을 찾으려고 구글 지도를 켰다. 가끔 엉뚱한 곳에 이르렀어도 가고 싶은 식당도 렌터카 회사도 잘 찾아냈다. 우리처럼 휴대폰에 의지하며 길을 걷는 한국인이 많았다.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안녕하세요!” 명랑하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돌아오는 우리말이 고운 노래로 들렸다. 

점심을 먹기로 한 초밥집이 하필 쉬는 날이다. 작은 식당 앞에 줄 선 한국인들이 보여 ‘여기가 맛집이구나’ 싶어 마지막 손님으로 입장했다. 돈가스 정식과 나가사끼 짬뽕을 주문했는데 튀김 정식이 차려졌다. 메뉴를 짚던 남편의 긴 손가락이 휘청거린 탓에 생긴 일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250엔을 더 내야 했지만 튀김 맛이 훌륭해서 기분 좋게 계산했다. 


사흘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줄 렌터카를 만났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신기함은 곧 현실이 되어 머리와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여행의 모든 것이 경험이고 모험인 것 같아 흥분됐지만, 낯선 땅에서 안전하기를 바라는 나는 미련 없이 남편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몇 번의 갈림길에서 남편은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켰다. “여보, 긴장돼?” 당황하는 모습이 몸 개그 하는 코미디언 같아 박장대소하며 물었다. “무슨, 이런 거에 긴장을.”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남편의 수고 덕에 나는 보조석에 앉아 생경한 도시를 즐기며 여행자 기분을 만끽했다.      


1시간 정도 달려 예약한 캠핑장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러 관리사무소에 가는 길, 심호흡했다. ‘언어 장벽에 부딪힐 시간’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졸아붙었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직원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곤니치와!” 인사를 나누고 나니 신기하게도 띄엄띄엄 일본어가 들렸다. 생글거리며 손짓 발짓으로 말하다 보니 어느새 손에 열쇠가 들려 있었다. 스르르 마음이 풀렸다.

잘 정돈된 아름다운 공원에 텐트를 펼쳤다. 낯선 땅에서 첫 밤을 보낼 우리 집이 뚝딱 지어졌다. 낭만을 더하기 위해 조명을 달고, 테이블을 펼쳐 맥주 두 캔을 올렸다. 남편이 지글지글 고기를 굽는 동안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휴대폰 메모장에 짧은 일기를 썼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고.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을 올려다보니 낮 동안 쌓인 긴장이 풀렸다. 남편과 나는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캔을 기울였다. 든든한 내 편이 있어 낯선 곳에서 평화와 낭만을 누린다. 이것만으로도 여행의 기쁨은 충만하다.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이른 아침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많아 부지런 떨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명한 곳을 관광하듯 찾아다니며 사진만 찍는, 그런 여행은 매력이 없었다. 우리가 바라는 여행은 자유롭게 찬찬히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말 그대로 ‘자유여행’이다.

여행하다 지칠 때면 작은 빵집에 들러 빵과 우유를 사 먹고, 배가 고프면 장을 봐서 밥을 해 먹었다. 공원에 앉아 대한해협을 바라보며 먹는 도시락 맛은 환상이었고, 소풍 나온 친구들의 다정한 인사로 환영받는 기분이었다. 그림 같은 작은 마을과 해변을 산책할 때는 도화지에 쓱쓱 풍경화를 그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완벽고 멋진 여행이었다.      


파도 소리에 눈을 뜬 마지막 날 새벽, 공기가 유난히 상쾌했다. 남편과 나는 손을 맞잡고 해변 산책을 다녀와 여유롭게 아침을 해 먹고 돌아갈 짐을 꾸렸다. 배낭 무게가 출발할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환전해 온 돈도 제법 많이 남아있다. 낭비 없는 여행을 한 것 같아 흐뭇했다. 며칠 더 머물자며 괜스레 농담을 던졌더니, 남편은 이사 온 거 아니었냐며 그걸 또 받아준다. 한바탕 농담이 지나가는 유쾌한 시간이다. 

온천욕을 하기로 했다. 시간이 넉넉해 일찍 텐트를 걷고 바닷가 마을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수건을 챙겨 온천으로 향했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근 순간 온몸의 피로가 스르르 풀렸다. 한갓지게 목욕을 즐기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상냥한 일본 할머니가 소녀처럼 해맑은 표정을 하고선 머리를 빗으라며 빗을 건넸다.     

 

“아리가토오고자이마스.”

사흘 동안 가장 많이 썼던 말이라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칸코쿠진데스.” 씩씩하게 대답했다. 놀란 아이처럼 재미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활짝 웃으며 나더 인상이 너무 좋단다. 그 말이 귀로 쏙 들어오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준비된 말이 넉넉지 못해 긴장됐어도 할머니의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 속에 녹아들었다. 외워 간 몇 마디 말로 짧은 소통을 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남편이 온천에 가자고 했을 때 몇 번을 망설였다. 낯선 곳에서 알몸이 되려니 부끄러웠다. 그냥 관광이나 하고 말았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따스한 소통이었다.  이런 것 또한 여행의 기쁨이구나 생각했다.    


간 작은 며느리의 은밀한 일탈은 위대했다. 많이 웃고 아주 행복했다.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손을 맞잡고 함께 본 풍경과 낯선 것들에 대한 경험을 영원히 기억할 테다. 

우리 둘은 배낭 가득 여행의 기쁨을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참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다음 여행을 상상해 본다. 그러니 이 여행은 대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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