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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정 Oct 17. 2024

덕후발굴단 : 덕질의 시작은 동심에서부터

유치원 교사의 교실 이야기


덕후발굴단 
덕질의 시작은 동심에서부터   

  

아이들의 옷이나 신발, 가방의 열쇠고리를 보면 아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아이들의 이곳저곳에서 공룡, 자동차,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디즈니, 티니핑, 산리오캐릭터, 포켓몬스터 등)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 파로 나뉘는데, 특히 공룡파와 자동차파가 대표적이다. 이 파에 속한 아이들은 공룡이나 자동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소위 말하는 ‘덕후’가 된다. 이때의 덕후 어린이들은 정말 대단한데, 그림자만 봐도 공룡의 그 긴 이름을 줄줄 외우고 특징까지 간파하고 있다. 저번에 공룡파와 조금 친해져 보겠다고 이름도 몰랐던 트리케라톱스 모형을 가지고 “내가 너희를 다 잡아먹겠다!”라고 이야기했다가, “걔는 초식공룡인데요? 걔가 잡아먹혀요.”라며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그 후로 뭔가를 아는 척하며 친해지려 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점을 질문하며 친해지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공룡파인 아이들과는 공룡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공룡의 특징이나 이름을 보는 일을 하루 일과에서 빼먹지 않고 함께 하고 있다. 


자동차 덕후도 둘째라면 서럽다. 자동차 덕후 중에서는 자동차 모델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아이가 있다. 사진만 보여주면 자동차 모델과 출시 연도를 안다. 등원 길에 우리 반 친구들 부모님 차의 기종을 모두 기억해서 등원한 친구에게 “친구야, 너 오늘 티볼리 2019년 형 타고 유치원에 왔니?”라며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내가 보았던 최고의 덕후는 바로 대중교통을 좋아하는 우재였다. 

우재는 대중교통 중에서 특히 지하철과 버스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유치원에서는 월요일마다 주말 지낸 이야기를 나누는데, 늘 그 아이는 주말에 이층 버스를 탔다고 자랑하거나 지하철 1호선을 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 날 우재가 “선생님은 유치원에 어떻게 와요?”라고 물어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라고 대답했는데 그날부터 나를 보는 아이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내가 여태껏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부러움이 가득해 보이는. 그 모습을 이모티콘으로 바꾸면 검정 바탕에 흰색 점들이 그려져 있는 만화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될 것 같았다. 

그 후로 “선생님, 오늘도 지하철 타고 왔어요?”가 우재의 인사가 되었다. 우재의 부러움을 받는 나는 뿌듯하게 대답했다. 

“응! 지하철 타서 수원역에서 버스로 갈아탔어.”

“선생님 1호선이죠? 오늘 탄 지하철은 동글이예요 납작이예요?”     

띠용! 지하철에 그런 게 있었나? 당황스러웠다. 

“그게 뭔데?”

“지하철이요. 1호선엔 동글이랑 납작이가 있어요.”

“선생님은 4호선 타고 오다가 1호선으로 갈아탄 건데?”

“4호선에는 뱀눈이랑 주둥이가 있는데! 이거 둘 중에는 뭐였어요? 와 진짜 부럽다!”


인터넷에 [경기도에 살면 인생의 20%를 지하철에서 보내게 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이걸 보았을 때 깔깔 웃으며 “맞아! 으하하”를 외친 나였다. 심지어 재미있다며 친구들에게 공유까지 했었는데…. 경기도민으로서 그렇게나 지하철을 많이 타 본 내가 난생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대부분도 모를 것이라 믿는다. (함께 동지애를 느끼고 싶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지? 지하철 마스코트 캐릭터 이름인가? 싶다가 이 정도 대중교통 덕후가 하는 말이라면 무슨 깊은 뜻이 있겠거니 하고 검색창을 열었다.


“우재야, 방금 지하철 뭐라고? 1호선이 뭐라고 했지? 선생님이 잘 몰라서 검색해 볼게.”

“1호선은 동글이, 납작이. 4호선은 뱀눈이, 주둥이요.”     


세상에나! 진짜 있는 말이었다. 이미지 탭을 클릭하니 조금씩 생김새가 다른 지하철 사진들이 나왔다. 아이가 말한 동글이, 납작이는 지하철 기종을 뜻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말은 아니고, 기종을 쉽게 부르는 애칭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지하철 기종을 알게 될 줄이야! 놀라움의 연속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우재는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듯이 “맞아요! 이거예요. 납작이는 얼굴이 납작해요. 동글이는 동그랗잖아요!” 하면서 화색이 돌았다. 우재의 말을 들으니 진짜 생김새가 달랐다. ‘아, 내가 이런 지하철을 타고 다녔구나.’ 생소했다. 다음은 4호선 차례였다. 뭐가 다른지 궁금해져 얼른 검색해 보았다.


“주둥이는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완전 새것이에요. 저는 한 번도 못 타봤어요. 뱀눈이 는 진짜 앞이 뱀눈처럼 뾰족하게 생겼는데! 봐봐요.” 우재는 옆에서 지하철 기종 가이드가 되어 설명해 주었다.

내가 이렇게 무감각했던가, 오늘 타고 온 지하철을 알려주려고 기억을 되짚어도 어떤 지하철을 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일부터는 어떤 지하철 탔는지 꼭 보고 기억해서 올게.” 


그 뒤로 나는 매일 출근길에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온다는 소리가 울리면 지하철의 얼굴(?)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내려서도 지하철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멀어지는 지하철의 얼굴을 보고 기억해서 우재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주둥이를 탄 날이면 우재는 부럽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이들은 무언가 좋아하는 게 꼭 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대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룡도 그냥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사는 곳, 먹이 등 특징까지 간파하고 있다. 우재도 지하철 기종은 물론이고 지하철 노선과 갈아탈 수 있는 역까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동심만이 할 수 있는 진심이 아닐까 싶다. 대충은 없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순수한 동심만이 가득한 마음.     

이런 동심을 들여다보니, 문득 우리 어른들의 덕질은 어렸을 적 동심에서부터 배운 진심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귀여운 스티커와 문구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나처럼 말이다.      



*덕후의 뜻 :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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