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을 달래려고 스무날동안 글로 크레타섬을 여행했다. 아침 안개와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치면 마당 한쪽에서 책을 펼쳤다.
오래전 책을 산 후 처음 한번, 두 번까지도 그 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여 곳곳을 여행하지 못하였다. 앞서 읽은 이야기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띄엄띄엄 읽다가 겨우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다 읽은 책'으로분류해 책장에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었다고말하기 찝찝할 정도로 남은 게 없었다는 것을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삼 년 전, 마음의 병을 안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뒤 뜬금없이 크레타섬 생각이 나서 책을 다시 읽어봤다. 등을 겨울 햇살로 따땃하게 데우며, 간혹 눈앞으로 흐르는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강가에 가서 책을 읽고는 했다. 그때서 나는 처음으로 크레타 섬의 땅을 밟고 바람과 햇살, 공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언제나 책을 펼치면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책 속에서 죽은 인물들은 다시 살다가 또 죽고 다시 살아났다 죽고는 했다. 페이지를 넘기다 말면 나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시골 섬마을 풍경이 눈앞에아른거렸다. 대지의 표정이 살아있는 얼굴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풍경, 물속에 잠긴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날씨, 머리 위로 바다처럼 한숨을 쉬는 바람, 하늘 가득히 흐르는 따사로움. 바람의 세기와 햇빛의 따스함 정도가실제처럼 와닿았다. 그것들은 살면서 직접 느껴봤던 자연이었다.
크레타섬은 마음속 낙원으로 자리 잡아 따스한 봄기운처럼 온몸을 순환했다. 직접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내가 느낀 대로 지어놓은 낙원을 정말로 아꼈다.
시원한 포플러 나무 아래 춤추는 젊은이들의 활기와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노인들의한가로움. 태양 아래 느긋하게 몸을 덥히는 바다와 그 위에 배를 대고 파도의 율동을 즐기는 갈매기들. 시원한 자갈밭,따뜻한 모레. 노토스와 시로코, 따듯한 남풍이 지나간 대기에서 나는 오렌지향, 레몬향, 월계수향.
레몬꽃과 인동덩굴 향기가 풍기고오렌지 나무 아래서 꾀꼬리가 우는 낙원 같은 과부의 정원.오르탕스 부인의 향수 냄새, 낡은 비단 실크화와 주름을 감추려고 목에 맨 노란 리본. 부인의 뜰 포도나무 아래 차려진 닭요리, 빵, 포도주. 황금 먼지를 뿌린 것 같은 저녁노을에 비치는 마당.
핑크빛 노을로 물든 수녀원의 회칠한 벽, 검은 자갈 흰 자갈이 깔린 깨끗한 마당, 로즈메리, 꽃박하, 나륵풀 화분이 놓인 단아하고 신선한 풍경! 소나무 숲을 오르면 나오는 수도원. 수도원 들보에서 나는 삼나무 냄새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꽃향기가 실린 봄바람, 풀밭에서 진동하는 야생화냄새와 붕붕거리는 꿀벌 소리,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고 조용하게 반짝이는 산.
크레타섬 곳곳의 풍경을사진 찍어대듯 문장으로 기록하여 여행에 남겼다.
당연한 것 같지만 '번역'이란 책을 읽는 이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과 대화가 다르고 글 역시 다르다. 수필과 시가 다르고 소설이 또 다르니, 다른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면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