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란 뭘까
평등이라는 단어의 모순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평등"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단은 아마도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철수보다 영희를 좋아할 수 있고, 주스보다 커피를 좋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어떤 것을 판단하는 한, 나는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평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숫자처럼 계산을 하기 위한 양적인 수치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여섯 사람과 피자 한 판이 있다고 하자. 피자 한 판을 똑같이 여섯 조각으로 자른 것 자체는 양이 같으니 평등(equal)하다고 할 수 있지만, 모두가 피자를 한 조각씩 먹는 것이 정말로 공평할까 하면 그 질문에 대답하기는 조금 어렵다. 여섯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덩치가 커서 섭취 열량이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건강상의 이유로 영양분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전혀 안 찌지만, 누군가는 조금만 먹어도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단적인 예로는 어릴 적 도덕책에서 봤던 장면이 있다. 달리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출발선을 하나 그어놓고 다양한 사람들이 뛸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출발선만 같으면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 뛰어 속도를 재더라도 공평한 걸까?
독일에서 느낀 남녀평등
독일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아마 어딜 가나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나는 대체로 남자가 좀 더 많은 상황(공대, 체육관, 회사 내 개발부서 또는 개발팀 등)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여초를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대를 나오고 나서 나는 여자들과 만날 일이 많았다. 나는 많은 독일 여자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놀랍게도 많은 여자 개발자들 및 여자 상사들을 매우 많이 만났으며 일 외적으로도 다양한 집단을 경험했다.
물론 내 경험에만 근거했기에 사람마다 상황마다 직업마다 회사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내가 느낀 독일이란 곳은 남녀 간의 차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독일 가정집에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아빠들이 어색하지 않았고, 정원일을 하는 엄마들도 많았다. 하지만 독일 엄마들이 이따금 하는 불만사항 중에서는 "아빠들이 아이들을 학교/유치원에 데려가거나 데려오지 않는다"였는데 또 나와 같은 팀의 남자 동료들 중 여러 명이 아이들을 데려다주느라 특정 시간의 미팅에 참석하지 못한다를 들었을 때는 꼭 맞는 말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홈오피스를 하며 미팅을 할 때, 남자들의 경우는 이따금 마이크 너머로 애 우는 소리가 났지만 여자들의 경우 단 한 번도 애들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던 것을 보면, 남자들은 애를 봐주는 여자들이 있지만 여자들은 애를 봐주는 남자들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다.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전 남자 친구의 부모님들은 매우 모범적인 부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었다. 남자가 주방에서 하루 종일 요리를 하고 빨래를 맡고, 여자는 정원일과 집 청소를 하고 매주 장구간의 운전을 맡았다. 두 분 다 풀타임 직장을 가지셨기 때문에 매우 피곤하셨을 텐데도 자식들에 쏟아붓는 정성 또한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과거에 남자들이 하던 일을 하고, 남자가 과거에 여자들이 하던 일을 한다고 해서 남녀평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요리를 잘하면 내가 요리를 맡고, 내가 버는 것이 더 낫다면 파트너보다 내가 더 버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짐은 덜어주면서 두 사람의 효율은 높이는 것이 목적이지 단순히 일의 양만을 두 사람이 똑같이 배분하는 것이 올바른 목적 설정일까?
내가 독일에서 만난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 및 외국인들은 이것은 '남자'가 하는 일 또는 '여자'가 하는 일에 대한 규정 같은 것을 짓지 않았다. 일은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로 존재할 뿐이었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고 원래 쓰던 사무실이 아니라 장소를 임시 사무실로 이전해서 회의 직전마다 커피를 준비하던 사람은 바로 (성별에 관계없이)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누군가가 타 준 커피'를 마실 때, 그 커피를 가져다준 사람은 생각해보면 항상 나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이 건네준 커피였다.
업무에 있어서도 여자니까 야근이 없다거나 남자니까 일찍 퇴근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성별이야 어떻든 상대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에 예/아니오로만 대답하면 된다.
하지만 독일도 휴가 철마다 아이가 있는 동료들을 우선 배려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자주 등장한다. 누구나 휴가철에는 휴가를 가고 싶겠지만, 더욱이 아이가 있는 기혼자라면 아이들이 방학을 했을 때 휴가를 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직원이 한꺼번에 동시에 휴가를 낼 수는 없고, 누군가는 휴가 시즌에도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매 번 아이가 있는 동료들만 휴가철에 휴가를 내도록 배려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 팀에서는 당시에 이렇게 사전에 설문조사를 했다. 누가 이번 7월 또는 8월에 "반드시" 휴가를 가야만 하는가? 혹시 대체할만한 휴가 날짜는 없는가?
나는 모든 것이 "배려와 상호존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이가 없다고 해서 휴가철에 휴가를 가질 권리를 빼앗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싱글인 입장에서는 사실 휴가를 꼭 그때 가지 않아도 되고 만일 불가피한 이유라면 휴가철을 고수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대체 날짜를 정할 수 있으니 가족이 있는 동료들을 배려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배려와 상호존중은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여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여름휴가만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여름휴가를 미루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될 것이다. 평소에 가진 시간적 그리고 정신적 여유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내적 여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대체로 평등한 독일에서 모임이 있을 때 남자들이 꼭 하는 것이 한 가지 있긴 하다. 바로 바비큐 파티 때 고기를 굽는 것이다. 불이라서 그런 건지 바비큐는 남자들이 굽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도 매우 올드한 클리셰(Klischee)다.
독일 사람이 하는 개그 중에 하나가 "여자가 장보고, 빵 썰고, 고기 준비해두면" 남자가 고기만 굽고 "남자가 고기 구웠다"만 크게 얘기하는 거라고...
아무튼 끝으로 평등이란 개념 자체가 앞서 언급했듯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설정일지 모르기에 한국이 하루빨리 남녀노소 모두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겨 지금보다 서로 더 배려해주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