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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Jul 28. 2023

덕적도 기행

민어울음이 사라지자 사람도 떠났다.

  민어 파시로 장사진을 이뤘다는 서해 덕적도를 찾아갔던 1979년의 이야기다. 섬 여행을 하자며 입사 동기 세 명이 덕적군도를 찾아갔다.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한 여객선은 외항에 정박한 대형 화물선 사이를 빠져나와 팔미도 등대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잔잔한 바다는 거대한 유리 고속도로를 깔아 놓은 듯 반짝인다. 인천에서 덕적도까지는 여객선으로 두 시간 가야 한다. 객선은 물때에 맞춰 북리 또는 진리 선착장을 선택적으로 들리는데 오늘은 북리에 먼저 들른다고 했다. 


  북리 선착장에 도착하자 경운기, 리어카를 끌고 마중 나온 십여 명과 내리는 승객 대여섯 명이 전부다. 승객보다 배달해 오는 물건이 더 많았다. 생필품, 옷가지 등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테이프로 붙인 종이상자, 고기잡이 어구 등 섬 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객선은 육지와 섬을 연결해 주는 생명줄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다. 

  우선 묵을 숙소를 구해야 했다. 여인숙 같은 숙박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끼니를 해결할 식당도 없다. 무작정 어촌계장을 찾아가 민박을 물었다. 새마을지도자를 겸하고 있는 그는 마을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육지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주며 자기 집 뒷방을 쓰라고 했다. 

  뒷방은 바다와 맞닿아 있어, 바다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창호지를 여러 번 덧바른 여닫이문은 드나들 때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낮았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이-익’ 소리를 내어 들락거림을 주인에게 알리는 역할도 했다. 식사를 부탁했더니 맨밥에 반찬이라곤 가을에 담은 짠지뿐이란다. 대신 오늘 잡은 농어를 회 떠 줄 테니 밥에 비벼 먹거나 맹물에 헹군 짠지에 싸서 먹으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밥상이 들어왔다. 밥그릇에 정이 넘쳤다. 양은 밥그릇에 더 담지 못할 정도 고봉밥을 가져왔다. 반찬으로 물에 씻은 묵은지 한 대접과 어린이 손바닥 크기로 두툼하게 썬 농어회를 대접에 담아왔다. 어촌계장은 반주하자며 소주 대병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먼저 밥사발에 소주를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마셨다. 안주로 농어회 한 점을 욱여넣듯 입에 넣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소주를 따라주었다. 순박한 인심에 거절하지 못하고 두어 순배 돌고 나자 세상이 평정되었다. 육지 사람이나 덕적도 사람이나 수십 년 이곳에서 산 사람처럼 똑같이 고주망태가 되었다. 술은 취하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다. 거나하게 취한 그는 과거 화려했던 이곳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만 해도 북리는 살만했어요. 성당도 있고, 음식점, 술집도 인천 못지않게 많았고. 국수봉 골짜기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한 이천 명 정도 살았어요. 민어 파시(고기가 한창 잡힐 때 현지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 때는 인천서 색시들이 몰려와 어부들 주머니 털어갔어요. 밤이면 민어 떼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설칠 정도였는데. 민어가 사라지자 사람들도 다 떠났어요.”  해롱거리는 이야기는 잠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음 탓일까? 새벽에 화장실을 찾았다. 화장실은 바다 위에 있었다. 갯벌에 긴 말뚝 십여 개를 박아 그 위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어른 팔뚝 굵기 통나무를 엮어 화장실과 석축을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그곳으로 다녔다. 화장실은 싸리 가지를 엮어 사각으로 둘러치고, 지붕은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 양철로 덮었다. 동남아에서나 볼 수 있는 수상(水上) 화장실이다. 변기 대신 네모난 구멍을 바다를 향해 뚫어 놓았다. 구멍 밑으로 바닷물이 들락거리며 올려다보는 통에 곤혹스러웠다. 철석 대는 소리도 문제지만 물결이 오가며 부딪칠 때마다 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엉덩이를 치는 바람에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하느라 볼일이 쉽지 않았다. 바다로 직행한 배설물은 파도에 쓸려 몇 차례 오가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능 좋은 수세식 화장실이다. 

  썰물로 갯벌이 드러난 시간에 일을 보면 바닷물 세례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터득했다.      

  부둣가 어선 위에선 그물 손질하는 어부 손길이 분주하다. 그물 손질을 돕던 어촌계장이 우리를 발견하고 어선으로 올라오란다. 기다렸다는 듯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목포가 고향이라는 늙은 선장이 어창 덮개를 열고 밑창으로 내려갔다. 안줏거리라며 어른 두 주먹보다 큰 소라를 바가지에 담아왔다. 갑판에 쏟아놓고 익숙하게 망치로 내려치더니 소라 꽁지는 갈매기 먹이로 던져주곤 흰 살 부분만 발라냈다. 두레박을 바다에 던져 바닷물 한 바가지를 퍼 올려 쓱싹 씻었다. 손잡이 부분이 벌겋게 녹슨 칼로 소라 살을 뭉텅뭉텅 썰어 순식간에 안주를 만들었다. 대병 소주 마개를 어금니로 능숙하게 따더니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뱃놈들은 다 이리 마싱-께- 돌아가며 한 모금씩 빱시다.”     


  시범이라도 보이는 듯 복더위 찬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차례다. 미지근한 소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사레들린 듯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소라 한 점을 초장 듬뿍 찍어 씹었다. 쫄깃하며 달콤한 참소라 맛은 기침 나올 듯 아프던 목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해졌다. 얼큰해진 선장은 민어 파시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이 좋았지 민어 파시 스믄 인천 색시들 몽땅 덕적도로 밀려 왔당게-. 색시 값도 민어 한 상자면 땡이여. 같은 고기라도 네 뼘 이상 크기는 ‘민어’, 세 뼘 내외는 ‘어스레기’, 두 뼘은 ‘가리’, 그 미만은 ‘보굴치’라고 이름도 여러 개여. 민어는 백성 게기여 회도 먹고, 산모 국 끓여 멕이믄 젖이 샘솟아. 백성 민(民) 자를 쓸 정도니께 백성 사랑을 받아온 물 게기지. 덕적도는 그때가 최고 였당게…!”     



  다음 날 서해에서 가장 높다는 덕적도 국수봉(해발 314m)에 올랐다. 발아래 덕적군도가 펼쳐졌다. 해신(海神)이 있다면 이곳에서 서해를 관장했을 것 같은 탁 트인 전망이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보여준다. 햇빛에 반사된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 선갑도 모습은 잔잔한 바다 커다란 수반에 올려놓은 아름다운 수석 같다. 

  내려오는 길에 민어와 함께 번영을 누렸던 북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짜기로 내려왔다. 군데군데 화려했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듯 크고 작은 집터들만 덩그러니 남아 흔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산폭발이 일어난 것도, 지진으로 파괴된 것도 아닌데 민어가 사라지자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분별한 모래 채취로 민어산란장이 사라지고, 바다를 오염시켜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만든 대가가 북리의 몰락을 가져왔을 거였다. 인간의 환경 훼손이 삶을 터전마저 파괴될 수 있다는 현장을 본 것 같아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여객선 스크루가 뿜어내는 거대한 포말처럼 민어 떼가 덕적도 앞바다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인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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