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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Aug 01. 2023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영혼 없이 결혼한 그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고치지 못했다.  

  잘못 꿴 첫 단추를 아직도 고쳐 매지 못해 고민하는 그에게 다녀왔다. 다양하게 친분을 맺고 연을 이어가는 친구는 많다. 그중에서 베프(최고의 친구)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관계다. 일생을 함께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특별한 관계다.

  시골 마을 뒷집에 살던 그와는 사춘기가 되면서 마음을 털어놓는 친밀함이 더해졌다. 은밀한 행위는 물론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 성적(性的) 고민도 함께 논의했다.

  초․중학교 동안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나와 함께 서울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형제 우애를 능가할 정도로 친해졌다.

  가난한 농촌 수재의 서울살이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먹고 자는 것부터 학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야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낮에는 삶의 현장에서 밤엔 학문의 길을 병행하며 고단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도 희망이 보였다. 국가직 공무원에 합격하여 체신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스물다섯이었다. 불우했던 과거는 끝이라며 축배의 막걸리를 함께 마셨다. 



  그러나 불우한 악귀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인생 출발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울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초임 공무원 교육이 그의 인생 발목을 잡는 교육이 되고 말았다. 삼십 명의 남녀 교육생이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각 부처에서 모인 교육생 중 가장 나이 어린 7급 공채인 그는 여성 교육생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교육 한 달 후 중간평가 시험을 끝내고 전체 회식이 있었다. 막내 격인 그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원 샷으로 비웠다. 회식이 끝날 무렵 소위 말하는 필름이 끊겼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잠에서 깨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라 놀랐다. 겉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 기겁할 일은 이불로 몸을 가린 벌거벗은 여성이 누워있었다. 이게 뭔 일인지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기억은 없고, 황당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말을 잊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만취로 인한 두통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이불속 여성이 손을 잡아끌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녀는 전화국에서 근무한다는 교육동기생이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깜깜했다. 그녀는 의외로 차분했다. 놀란 그를 달래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뭘 걱정 말라는지?

  도망치듯 여관을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움켜쥐고 상황을 복기하려 쥐어짜도 지워진 기억은 백지상태다. 함께 회식했던 다른 교육생에게 문의했으나 많이 취했더라는 이야기 외 원하는 답을 들을 순 없었다.      


  월요일 강의실에서 만난 그녀는 야릇한 짧은 미소를 보냈다. 가슴이 철렁했다. 미소의 의미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강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아무 말 없는 그녀와의 교육은 죽을 맛이었다. 토요일 날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그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떻게 대처하고 이 난국을 넘겨야 할지 고민 속에 약속 장소에 나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농담을 건넸다.      

  “잡아 먹힐 사람처럼 얼굴이 왜 그래요? 맛있는 밥이나 먹자는 건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상태가 아니다. 그날 밤을 알고 있는 유일한 그녀의 말을 들어봐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녀는 그날 밤의 일은 관심 밖인 듯. 오늘을 즐겁게 보내자는 분위기다. 밥을 먹자, 영화를 보자, 맥주를 마시자…. 보통 연인들처럼 유도해 갔다.

  어떻게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 미칠 지경이다. 뿌리치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볼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녀를 따라다녔다. 마지막 코스로 맥주 한잔하더니 거리낌 없이 집에 가서 자고 가란다.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어서 같이 가도 관계없단다. 수년을 연인관계로 지낸 사람에게 말하듯 했다. 미칠 지경이다. 

     

  몇 주를 고민하던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코를 단단히 꿴 것 같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 대한 의심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술 취한 그를 의도적으로 여관으로 유인한 것 같단다. 나이도 세 살 많고, 외모도 이상형과는 너무 달라 여자 느낌이 전혀 없는 상대라고 했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듣기 싫다고 했다. 

  죽든 살든 직접 그날의 상황을 물어보고, 의사표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그 건 다음 상황이니 닥치면 걱정하자며 위로했다.

  며칠 후 큰일이 벌어졌다며 허둥지둥 찾아왔다. 결혼하자고 하더란다. 황당한 건 만약 책임지지 않으면 고발하여 공무원 잘리게 하겠다며 위협적 발언도 했다는 거다. 거기다 더해 감사실에 있다는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나타나 협박을 하더라며 풀이 죽어 있었다. 사촌은 내가 만나 해결할 테니 결혼은 죽어도 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하라고 했다.    

 


  삼 년 여의 갈등 속에 그는 연기하듯 영혼 없는 결혼을 했다.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의도적으로 월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생활조차 불우한 운명이 끈질기게 그를 끌고 나아갔다. 아내는 허니문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내면에 숨겼던 본색을 드러내더란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기 시작하더니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폭력적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친 욕설을 토해내어 무섭다고 했다. 심지어 식칼을 들고 와서 죽여버리고 자기도 죽겠다고 한 적도 있단다. 벗어나기 위해 지방 근무를 자청하고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했다.      

  명석한 그는 공직자로 성공하여 관리관 지위까지 올랐다. 문제는 정년 퇴임이었다. 종일 얼굴 보며 한집에 산다는 건 지옥에 들어가 있는 거라 했다.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을 땐 집을 나와 술을 마신다고 했다. 그런 날엔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몇 마디에 그의 심리적 고통이 전해진다. 나이 들며 더 심해진 폭력적 욕설은 종교적 위안으로도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자살도 생각했고, 우울증이 온 것 같다며 취한 듯한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런 고통을 들어주기 위해 서울에 가서 그를 만난다.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으면 좀 좋아질까 해서다.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며 영혼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갈까? 

  수십 년 동안 폭력적 언어에 길들여져 그루밍 정신 상태여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번 만남에서 자신을 위한 삶이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제라도 그 자신만을 위한 삶으로 바꿔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의도된 주제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황혼 이혼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래도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었다.    

       

  “친구! 뭐가 남아있다고 잘못 끼운 첫 단추를 고쳐 끼우려 하지 않는가? 이혼하고 훨훨 날아보게나…! 요즘 황혼 이혼은 흉도 아니라네.”(사진 lee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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